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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시기의 소금생산유적 발굴/평안남도 온천군에서, 고고학의 견지에서 큰 의의

2014년 07월 16일 11:35 공화국
온천군에서 발굴된 소금생산유적(조선중앙통신)

온천군에서 발굴된 소금생산유적(조선중앙통신)

2일발 조선중앙통신은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와 인류진화발전사연구실, 평안남도 온천군 원읍고급중학교 교원, 연구사, 학생들이 온천군에서 고구려시기의 소금생산유적을 처음으로 조사발굴한 소식을 전하였다.

연구집단은 2012년초부터 여러차례에 걸쳐 온천군 원읍지구에서 유적조사 및 발굴사업을 진행하였다. 발굴작업은 작년 10월에 완료되였다.

유적은 크게 두개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우선 돌과 벽돌로 축조된 구조물이 발견되였다.

이 구조물은 아궁시설과 연소실, 내굴길시설로 이루어졌다.

아궁시설에는 아궁구멍과 그 량옆에 두개의 재처리용구뎅이들이 있다.

돌로 네벽을 축조한 연소실의 바닥은 돌과 석회를 섞어 다진것이며 그 밑에서 센 열을 받은 불그스레한 흙층이 발견되였다.

연소실의 뒤부분에는 연기가 빠지는 내굴길시설이 있는데 그 중간부분에 원형의 그릇을 올려놓을수 있게 내굴길벽을 깎아내여 만든 공간이 있다.

또한 검은색의 재가 두텁게 깔린 웅뎅이시설을 찾아냈다. 이 웅뎅이는 바다물을 끌어들일수 있는 도랑과 련결되여있고 그 중심에 돌을 일정한 높이로 쌓아놓은 부분이 있다.

여러가지 종류의 질그릇, 벽돌, 쇠로 만든 평가마쪼각, 녹아붙은 쇠덩어리, 짐승뼈와 뿔 등 많은 유물들도 발견되였다.

새로 발굴된 유적은 고구려시기의 바다소금생산유적이라는것이 판명되였다.

질그릇들과 벽돌들은 4세기 중엽에 해당한것으로 고증되였다.

【해설】당시 중국보다 앞선 기술, 일본에도 전파

유적주변 지층의 염도가 매우 높고 두터운 재층이 깔려있으며 바다물을 끌어들이는 도랑이 형성된것은 이 유적이 당시에 바다물로부터 소금을 생산하던 시설이였다는것을 충분히 알수 있게 하여준다.

지금까지 국내학계에서는 해당한 자료부족으로 소금생산기술에 대한 연구는 공백상태나 다름없었다.

이번 유적발굴로 고구려시기에 이미 매우 높은 수준의 소금생산기술이 확립되여있었다는것이 확인된것과 함께 앞으로 다른 시기의 소금생산과 련관된 문제들을 과학적으로 해명할수 있는 시발점이 마련되였다.

연구자들은 이번에 발굴한 고구려시기의 소금생산유적과 그 당시 주변나라들의 고고학적인 소금생산자료들을 대비분석하면 고구려문화의 독자성과 높은 발전수준을 잘 알수 있다고 말한다.

중국의 소금생산유적유물은 대체로 내륙지대의 지하염수로 소금을 생산한 사천성과 바다소금생산지인 산동성에서 발견된것들이다.

사천성 중상시 충현에서 발굴된 증파유적과 성도에서 발견된 한나라시기의 벽돌에 새겨진 그림들을 보면 그 지방사람들이 소금우물에서 퍼낸 염수를 직접 썼다는것을 알수 있다. 당시 중국에서 소금생산과정에 농축을 거치지 못하였고 가마시설도 여러개의 원형가마를 련이어 설치하는 방법으로 만들어졌다는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의 소금생산기술이 중국의 한나라와 당나라시기에 존재한 소금생산방법보다 높은 경지에 있으며 생산공정과 설비들도 서로 다른 계통에 해당된다는것을 보여준다.

연구자들은 이번의 발굴고증이 고구려의 발전된 문화가 일본의 문화발전에 준 영향을 밝히는데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지적한다.

이 유적은 8세기이후 일본에 바다물을 농축하여 쇠가마로 끓이는 소금생산기술을 전파한 곳이 어디인가를 해명하는 물질적사료로 된다.

일본의 학자들은 작은 질그릇들을 몇십개씩 모아놓고 불을 지펴 원시적인 방법으로 소금을 생산하던것이 평가마에 의한 소금생산방법으로 이행한것이 소금생산력사에서 하나의 분기점을 이룬다고 보고있다. 바로 이러한 이행이 어디에 원점을 두고있는가 하는 문제는 이러한 생산방법이 먼저 생겨난 지역을 해명하면 알수 있다.

연구자들은 쇠로 만든 평가마에 의한 소금생산방법이 4세기중엽 고구려에서 이미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일본에서 현대까지 존재하는 소금생산기술의 연원이 바로 조선에 있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하고있다.

【평양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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