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도산 서거 50돐, 딸이 추억하는 《민족의 사나이》
2013년 11월 28일 16:57 조국・정세 주요뉴스《아버지의 선묘, 가보면 좋겠다》
【평양발 김지영기자】올해 12월 15일은 력도산(力道山:본명 김신락)이 서거하여 50돐이 되는 날이다. 1950년대 일본프로레스링계의 초석을 마련하여 격투장에서 미국인선수들을 보기 좋게 물리쳐 《전후최대의 용사(HERO)》로 일러진 력도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민족의 용맹을 떨친 인물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있다. 서거 50돐을 맞으며 력도산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는 가운데 평양에 사는 그의 딸 김영숙씨(70살)는 이역땅에서 잠들고있는 아버지를 감회깊이 추억하고있다.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
력도산의 고향은 함경남도 홍원군 룡원면 신풍리. 김영숙씨는 어릴 적에 아버지를 보았던 기억이 없다. 그는 어머니한테서 일본에 건너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너의 아버지가 힘이 세고 생기기도 잘 생겼는데, 씨름을 잘하니까 일본사람이 와서 보고선 데려가겠다고 했답니다.》
총각이면 쉽게 일본에 끌려갈수 있다고 생각한 력도산의 부모가 아들을 장가들였는데 결국 아들은 1939년 현해탄을 건너 니쇼노세끼베야(二所ノ関部屋)에 입문하였다. 《력도산》은 김신락의 씨름군으로서의 이름이다.
해방전 김영숙씨는 순회흥업을 위해 조선에 온 아버지를 한번만 만난적이 있다.
《내 나이 3살이였는데, 그때 아버지가 일본식 상투를 땋고 <하오리>를 입고 <게따>를 신었으니까 무서워서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이건 내 딸이 아니라고 울타리밖으로 확 던졌다고 합니다.》
력도산은 1949년에 세끼와께(関脇)의 지위까지 올랐으나 돌연히 일본씨름군의 상징인 상투를 자체로 자르고 《오즈모(大相撲)》와 결별, 프로레스링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일본프로레스링협회를 1953년에 설립, 《가라떼쫍》으로 미국인선수를 차례차례 쓰러눕히는 력도산은 당시 갓 시작된 텔레비죤방송의 주역이였다. 1958년에는 로스안젤스에서 진행된 시합에서 J.S. 루테즈를 타승하여 헤비급 세계왕자가 되였다.
니이가따에서 부른 《내 나라》
력도산은 자신의 본명과 고향을 숨기면서 격투장에서 싸웠다. 그는 《패전국 일본》의 국민들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존재였으나 당시 재일조선인들은 한피줄을 이은 동포의 활약을 민족의 관점에서 보았다.
1959년 재일조선인들의 공화국으로의 귀국사업이 시작되였다. 력도산의 무용담은 그의 조국에도 전파되였다.
2년후 김영숙씨는 아버지와 상봉한다.
《1961년 11월 귀국선으로 쓰던 배를 타고 니이가따항에 갔댔습니다. 배에 올라탄 아버지를 만났는데 그 짧은 상봉의 추억이라고 하면 아버지를 붙들고 마구 울었던 일 그리고 함께 식사를 하고 아버지앞에서 노래를 불렀던 일이 떠오릅니다.》
그때 김영숙씨는 《내 나라》를 불렀다고 한다. 《산 좋고 물맑은 아름다운 내 나라 / 여기 내가 태여났고 자라나는 곳》의 가사로 시작되는 노래다.
당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력도산의 경기장면을 촬영한 영화화면을 보시고 일본의 어려운 조건에서 조선사람의 자부심을 가지고 산다는것은 좋은 일이라고 하시면서 영화를 보면 민족적긍지를 북돋아줄수 있을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고 한다. 그리고 력도산이 조선사람이면서도 일본선수라는 욕된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일본반동들때문이라고 하시였다고 한다.
력도산은 사망하기 몇해전부터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시하고있었다.
1962년 4월 김일성주석님의 탄생 50돐에 즈음하여 그이께 고급승용차를 선물로 드렸다. 김영숙씨에 의하면 《자필로 된 접시》도 함께 올렸다.
《<김일성수상 만세!>라고 한문으로 썼더만요. 자기 손도장도 찍었습니다. 맹세문이나 같지요.》
력도산은 1964년 도꾜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참가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선수단의 비용을 자기가 부담할것을 표명하였다. 김영숙씨에 의하면 귀국의 의사도 전하고있었다고 한다.
령전에 애국렬사증을
조선에서도 력도산에 관한 실화나 소설이 출판되여왔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민족의 사나이》라는 제목의 텔레비죤련속극도 제작되였다. 여기서는 력도산의 《의문의 죽음》이 그의 만년의 조국지향과 련관되여 형상되고있다.
1963년 12월 8일 력도산은 도꾜 아까사까의 나이트클럽에서 야꾸자 조직원의 칼에 찔린다. 전치 3주일의 경상이라고 진단되였는데 병원에서 두번 수술을 받다가 돌연히 숨졌다. 사망원인은 복막염이라고 발표되였다.
이듬해 조선에서 애국렬사증이 력도산에게 수여되였다. 렬사증은 지금도 김영숙씨가 간수하고있다.
1993년 1월 20일 김일성주석께서는 김영숙씨를 만나주시고 력도산이 그래도 조국에 자식 하나를 남겼다고, 일을 잘하라고 말씀하시였다고 한다. 그해 2월 18일 김정일장군님께서도 김영숙씨를 부르시여 그가 후대들을 나라의 훌륭한 일군으로 키울것을 당부하시였다고 한다.
김영숙씨에게는 5명의 딸이 있다. 손자, 손녀는 6명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후대들에게 력도산의 삶에 대하여 말해준다고 한다. 조선민족으로서의 긍지감과 부당한 차별에 대한 반발심이 그에게 무서운 힘을 낳게 하였다는데 대한 이야기다.
《조선풍습에 객사한 사람의 제사를 하지 않는다며 12월 15일은 그저 지내왔습니다. 그래도 추석에는 나도 아버지를 찾아가고싶은데 묘소가 없으니 어쩔수 없습니다.》
력도산의 묘소는 도꾜 오따구의 이께가미 혼몬지(池上本門寺)에 있다. 김영숙씨는 1995년에 일본을 방문하여 그 묘소를 한번만 찾은바 있다. 그때로부터 18년의 세월이 흐르고 그의 나이도 70이 되였다.
《조일관계가 개선되면 또 한번 가보면 좋겠습니다. 애국렬사증을 아버지의 령전에 드리고싶습니다.》
해마다 12월 15일은 특별한 식을 하지 않았지만 서거 50돐을 맞이하는 올해는 김영숙씨의 집에 온 가족이 모인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여도 잊지 말아야 할것들이 있습니다. 올해는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아버지를 함께 추억하려고 합니다.》
(조선신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