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해방전쟁에 참가한 로병들의 증언
2013년 04월 10일 14:01 공화국최고사령관께서 안겨주신 《최후승리의 신심》
【평양발 리태호기자】조미대결의 총결산을 위하여 전민항쟁에 떨쳐나선 인민들은 태양절을 맞으며 미국을 타승하시여 조국을 수호하신 김일성주석님의 전승업적을 감회깊이 돌이켜보고있다. 특히 전쟁에 참가한 로병들은 강철의 령장을 모신 조선은 제국주의와의 대결에서 언제나 련전련승한다고 강조하고있다.
방송연설에 호응하여
심용근씨는 일제식민지지배로부터 해방된 기쁨을 안고 고향인 함경남도 단천에서 가족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였다. 1950년 그는 큰 희망과 포부를 안고 단천제1고등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그의 소박한 행복을 무참히 미제침략자들이 짓밟아버렸다.
1950년 6월 26일 김일성주석님께서 전체 조선인민에게 하신 방송연설《모든 힘을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는 애국심에 불타는 청년들의 심장을 두드렸다.
《전체 조선인민은 또다시 외래제국주의자들의 노예가 되기를 원치 않거든 리승만매국〈정권〉과 그 군대를 타도분쇄하기 위한 구국투쟁에 다같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온갖 희생을 모릅쓰고 반드시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여야 하겠습니다.》
심용근씨는 《최후의 승리를 위하여 앞으로 나아가자!》는 최고사령관의 부르심에 호응하여 1950년 7월 6일 조선인민군에 입대하였다. 16살때였다.
그는 서울, 포항, 경주 등지에서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전략적후퇴시기는 자강도까지 후퇴하였다. 그후 1211고지방어전투, 함흥방어전투에서 용감히 싸워 전승을 맞이하였다.
올해 79살이 된 그는 전승 60돐이 하루하루 다가오는 이 시각 전사한 전우들에 대한 생각이 많이 든다고 한다.
《우리는 사회주의조국의 배려와 혜택을 받아 행복한 삶을 누릴수 있었다. 그런데 조국의 고지들마다에 무주고혼으로 남아있는 전우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조선에서는 전승 60돐을 향하여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확장공사, 전쟁희생자들의 묘 건설공사가 한창 진행되고있다. 로병들은 미제침략자들을 물리친 김일성주석님의 업적 그리고 주석님만을 믿고 따르며 용감히 싸운 조국해방전사들의 용맹을 길이길이 전하는 이 건설사업을 감사의 마음으로 지켜보고있다.
《미국과의 전면대결전속에서 맞이하는 전승 60돐, 이 사업은 우리 조국의 또 하나의 력사적승리로 장식될것이다. 김정은원수님에 대한 고마움으로 또 눈물이 나온다.》
명령대로 써우면 이긴다
조국해방전쟁에 참가한 로병들은 락동강도하전투, 1211고지방어전투 등에서 승리한 조선인민군의 용맹에 대하여 강조한다.
락동강도하전투에 참가한 로병 강병호씨(79살)는 당시의 상황을 지금도 생동하게 이야기한다.
전투는 1950년 8월 31일부터 9월 1일까지 경상북도 달성군 부동(현풍)과 경상남도 의령군 남강사이 지역에서 벌어졌다. 조선인민군의 반격으로 부산까지 쫒겨간 미군과 남조선군은 락동강강슭과 경산산줄기의 유리한 자연계선에 완강한 방어진지를 꾸려 여기에 병력과 화력을 집중시켜 인민군의 진격을 막아보려고 하였다.
침략군의 포격, 총격으로 《불비》가 내린 락동강은《불바다가 되여 강물이 끓고 여기저기에 물기둥이 섰다.》고 한다. 그러나 인민군용사들은 불비속을 용감하게 돌진하여 《난공불락의 요새》를 끝내 돌파하였다.
전쟁시기 가장 가혹했던것이 전략적후퇴시기였다고 한다.
《신발하나 얻지 못해 맨발로 산길을 걸었다. 먹을것이란 풀뿌리나 산열매만이였다.》
인민군대를 따라 함께 후퇴하는 주민들속에는 로인들, 어린이들도 있었다. 중상을 입은 병사도 적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적들의 회유기만책, 간첩행위까지 겹쳤다. 포위속에서 집중폭격을 받기도 했다.
이 시기 북반부 도시들을 일시적으로 강점한 침략자들은 도처에서 야수적인 민간학살만행을 저질렀다.
심용근씨의 고향 단천도 례외가 아니였다. 단천군 직철리에서 미군과 남조선군은 주민살림집들에까지 기여들어 집안을 몽땅 뒤짚어 불을 질렀으며 어른들을 고문한 끝에 학살하고 아이들을 생매장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심용근씨의 어머니와 동생, 삼촌, 사촌동생을 비롯한 가족, 친척 8명이 희생되였다.
조선은 어떻게 미국을 타승할수 있었던가. 강병호씨는 《최고사령관의 명령대로 하면 적들의 움직임까지 제때에 알수 있었으며 전투에서 이길수 있었다.》고 말한다. 1211고지방어전투를 그 대표적인 실례로 든다.
침략군은 1951년 9월초 1211고지일대에서 대규모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적들의 기도를 꿰뚫어보신 최고사령관께서는 서해안의 일부 방어부대들을 전선동부에 기동시키는 한편 1211고지일대에 강력한 방어지대를 형성하여 여기에서 일대 섬멸전을 벌림으로써 적의 공세를 격파할데 대하여 미리 명령을 내리시였다.
1211고지를 적들에게 빼앗기면 금강산을 잃게 되며 주변에 방어진지를 꾸릴 고지가 없으므로 원산까지 잃게 된다.
전투의 의의와 목적, 방법이 명백히 담겨진 최고사령관의 명령과 지도는 병사들을 각성시키고 힘과 용기를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최고사령관의 현명한 령도와 전사들, 인민들의 영웅적인 전투로 적들이 기도한 《공세》는 격파되였다.
로병들은 조선이 병력과 무력에서 우세했던 미국을 타승할수 있었던 요인에 대해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였기때문이고 최고사령관의 두리에 군대와 인민이 일심단결하여 성스러운 정의의 전쟁을 싸웠기때문이다.》고 입을 모은다.
《노래나 영화에서 형상된것처럼 우리는 싸움터마다에서 해방의 은인이신 김일성장군님을 그리며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를 듣기만 해도 적들은 벌벌 떨었다. 우리 전사들은 탄약과 총알이 떨어지면 적의 기관총을 자기 가슴으로 막았으며 적들과 육박전을 하고 총을 빼앗아내기도 했는데 그 담력과 배짱을 안겨주신분이 바로 김일성장군님이시였다.》
조국해방전쟁에서는 적구에서 무기를 든 《남조선의용군》의 활약도 있었다고 한다. 《적구에서 〈김일성장군 만세!〉의 환호가 울리면 우리 인민군 전사들도 배심이 든든해졌다.》고 한다.
행복을 안겨주신 은인
서울출신인 림정아씨(80살)는 13살때 집이 너무 가난해서 평양에 팔려갔다고 한다. 해방직후인 당시로 말하면 아직 일제식민지잔재가 남아있었으며 미국의 강점하에 있었던 서울에서는 생활하기가 힘들었다.
머슴살이를 하다가 구원된 그는 성인중학교에 다닌 후 《로동신문》 인쇄공이 되여 보람찬 삶을 누리게 되였다. 전쟁이 개시되자 8월에 입대하고 무전수로서 활동하였다. 오늘은 자식들, 손자들을 보고 행복을 누리고있다.
《가난뱅이였던 내가 김일성장군님의 품에서 학교를 다니고 무전수로서 조국해방전쟁에 참가하였으며 대원수님들의 품에서 행복을 누릴수 있었다. 미국의 악랄한 도발책동속에서도 사회주의제도를 수호하신 대원수님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한편 전쟁시기 그는 인민군의 2차 서울해방전투에 참가하였다. 전선사령부직속무전수로서 활동한 그는 고향의 해방을 못내 기뻐하였으나 부모형제들을 그만 찾아내지 못해 오늘까지 살아왔다.
그는 《우리 사회주의제도를 허물어버리려는 철천의 원쑤 미제의 책동을 이제야 총결산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최후승리에 대한 신심과 담보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초강대국이라고 하는 미국과 정면으로 맞서시는 김정은원수님께서는 제국주의침략자들을 물리치신 김일성주석님과 미국의 고립압살책동을 짓부시신 김정일장군님의 담력과 배짱, 지략과 령군술을 그대로 이으셨다. 최고사령관이 계시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철리는 60년전의 전쟁시기도 오늘도 변화가 없다.》
(조선신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