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고】또다시 온다 4.24의 날/김아필


김태일소년이 잠드는 도꾜 青山霊園의 《해방운동 무명전사의 묘》

올해는 4.24교육투쟁 65돐이 되는 해이다.

잘 알려져있는바와 같이 4.24교육투쟁은 어느 한정된 지방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본각지 동포사는 곳마다에서 일어난 력사적인 애족애국투쟁이였다.

나에게 있어서 이 시절은 민족의 얼을 되찾고 애족애국의 길을 선택하여 첫걸음을 내디딘 포부와 희망으로 가슴 불타던 청춘시절이였다.

나는 17살때인 1947년 6월에 조련 오사까부본부소속 오사까조선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급격히 늘어난 조선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첫 초등학원 교원양성기관으로서 당시 민족교육의 최고학부였다.

시대의 부름에 호응하여 떨쳐나선 우리 학생들의 자각과 자부심, 향학심은 매우 높았다.

학생들은 잠을 줄여가면서 공부에 열중하였으며 동포들의 각종 모임과 시위에도 앞장서 참가하였다.

그런데 미점령군과 일본당국은 출발첫날부터 사사건건 걸고들며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아나섰다.

오사까부당국은 탄압의 첫 과녁을 조선사범학교로 정하고 학교페쇄를 거듭 강요하였으며 1948년 4월 12일에는 부하 1개 중학교와 16 초등학원에 대한 페쇄지령을 내렸다.

효고, 오사까를 비롯한 일본각지 우리 조련조직과 동포들은 민족교육사수투쟁에 결연히 일떠나섰다.

련일 학교페쇄령 철회투쟁을 벌려온 효고현하 일군들과 동포들은 1948년 4월 24일 현청앞에 모여들었다.

대표들이 현지사와의 회담을 계속하고있는데 돌연히 방안에 쳐들어온 미헌병대 부사령관과 헌병 2놈이 권총을 빼들고 대표들을 향하여 《당장 방에서 나가라! 나가지 않으면 쏘아죽인다!》고 고아대였다.

그러나 우리 대표들은 《쏠려면 쏴봐라!》고 가슴을 들이대며 목숨을 걸고 항거하였으며 끝내 현지사로부터 페쇄령을 철회하겠다는 문서에 서명을 받아내였다.

그런데 서명한 문서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미군정부는 그날 밤 11시경 미군의 일본점령 전기간에서 처음으로 《비상사태선언》을 발포하고 25일 새벽에 일군, 교원, 동포 집을 습격하여 야만적인 《조선인사냥(朝鮮人狩り)》으로 1974명을 체포구금하는 전대미문의 폭거를 감행하였다.

오사까부당국에 대한 패쇄령철회와 구속자석방투쟁을 련일 벌려온 부하 동포들은 4월 26일 아침부터 부庁앞 공원에 모여들고 《조선인학교페쇄 절대반대 인민대회》를 가지였다.

대회에서는 15명의 대표를 선출하여 오후부터 부당국과의 교섭에 들어갔다.

우리 사범학교 학생들은 아침에 등교하여 협의를 마치고 제각기 전차를 타고 대회장으로 바삐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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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교육투쟁

대회장은 3만명을 넘는 동포들로 립추의 여지없이 들끓고있었다.

군중들을 수천명의 무장경찰대가 둘러싸고있었다.

오후 4시 가까이가 되여 오사까미군정부는 오사까市경찰국장을 내세워 회담중단과 군중해산을 대표들에게 강요하였다.

대회에 모인 군중들은 부당국과의 교섭결렬에 대처한 대회지도부의 호소에 따라 해산하여 기로에 오르기로 하였다.

군중의 선두대렬이 움직이기 시작한 그때였다. 부庁앞에 대기하고있던 수대의 경찰소방차가 군중을 향하여 일제히 물을 퍼붓기 시작하였다. 군중들은 돌연의 사태에 대혼란에 빠졌다.

이때를 기다리고있었던 무장경찰대는 돌아가는 군중들을 향하여 뒤에서 무차별로 총을 란사하였다. 총을 맞은 동포들이 여기저기에서 쓰러졌다.

조선사람이라면 아이, 어른,관계없이 죽여도 좋다는것이다.

이날 나는 놈들의 총탄을 맞아 쓰러진 한 소년을 수명의 동포들과 함께 끌어안고 병원으로 달렸다.

도중에서 뒤에서 온 소형짐차를 멈춰세워 운전수에게 부탁하여 그를 태워서 日赤병원까지 갔다.

병원에 도착하여 어둑어둑한 빈 방의 책상우에 그를 눕혀놓고 비로소 소년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는 숨이 막힐 정도로 놀랐다.

그는 뒤통수에 맞은 총알이 머리에서 빠지지 않고 피투성이 얼굴이 퉁퉁 부어오르고있었다. 맹관총창(盲管銃創)에 의한 즉사였다.

후에 나는 그가 김태일소년이라는것을 알았다.

4월 27일부로 미군제25사단장 명의로 오사까市경찰국장에게 학교페쇄령을 반대하는 조선인들을 《철저히 아주 훌륭하게 진압》한것을 치하하여 표창장을 수여하였으니 놈들이 얼마나 인간의 탈을 쓴 살인마들인가를 잘 알수 있다.

나는 귀축같은 만행을 감행하고도 눈 깜짝 하지 않는 일제때 그대로인 놈들에 대한 분격으로 온몸이 떨렸던 그날 일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4.24의 투쟁속에서 오사까조선사범학교는 3년간에 4번이나 배움의 마당을 옮겨가면서 공부를 계속하였으나 1949년 10월 20일 제2차 《학교페쇄령》후 3학년생 졸업식과 함께 1, 2학년생 수료식을 거행하고 끝내 학교문을 닫게 되였다.

사람의 한생에서 3년은 한순간이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길이길이 기억에 남는 불같은 3년세월이였다.

그후 나는 교원으로 배치되여 1949년부터 17년간 효고, 오사까, 와까야마 등지의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런 속에서 나는 수많은 선배와 친우, 후배와 제자들 그리고 은정깊은 동포들을 만났으며 긍정적자극과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살며 일하였다.

특히 미일반동들의 온갖 탄압과 방해책동을 이겨내며 민족의 생명선인 민족교육의 화원을 꽃피우는 한 성원으로 사업하면서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심장으로 깊이 간직한것,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나의 귀중한 재산이며 보배이다.

또한 오늘날까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민족교육사업과 인연이 깊은 나날을 보낼수 있은것은 참으로 행운의 인생이였다고 생각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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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한다. 현재 도꾜 青山霊園의 일각에 건립된 《해방운동 무명전사의 묘》에는 김태일소년도 잠들고있다.

4.24시대에 산 1세동포들이 적어지고 새 세대가 동포사회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오늘 4.24의 정신을 대를 이어 계승하는 문제가 더욱 중요하다는것을 통감하게 된다.

오늘 민족교육의 실상도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것이 있다. 그것은 미일반동들의 민족말살광풍이 휘몰아치는 속에서도 끄떡없이 살아있는 민족교육의 억센 뿌리이다. 그 뿌리가 있어 4.24의 애족애국정신은 맥맥히 이어져가고있다.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 《고등학교무상화》적용제외와 교육보조금 동결보류소동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는바와 같이 일본당국은 우리의 성스러운 민족교육의 숨통을 끊어버리려고 온갖 방해탄압책동을 더욱 악랄하게 감행하고있다.

그러나 애족애국의 기치높이 일심단결하여 나아가는 재일동포들은 절대로 그들앞에 굴복하지 않을것이다.

새 세대를 중심으로 재일동포들은 경제형편이 심각한 환경과 조건속에서도 교사신축과 증축보수, 교육환경정비 등 민족교육을 계속 꽃피우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있다.

특히 새 세대 동포들이 앞날에 대한 밝은 희망을 가지고 동포사회는 물론 일본사회의 각 부문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고있는 소식들은 우리 1세동포들을 매우 기쁘게 하여주고있으며 큰 힘을 북돋아주고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정성, 어린이사랑과 민족교육을 끝까지 지켜나가려는 뜨거운 마음, 그것은 바로 4.24의 정신이다.

또다시 4.24의 날이 온다.

(문예동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