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선으로 끌려갔다가 조선에 돌아온 김광혁부부와의 국내외기자회견 진행
2012년 11월 09일 09:02 공화국 주요뉴스조선중앙통신에 의하면 남조선당국의 책동으로 남쪽땅에 끌려갔다가 환멸을 느끼고 조선으로 돌아온 김광혁부부와의 국내외기자회견이 8일 인민문화궁전에서 진행되였다.
기자회견에는 우리 나라 출판보도부문과 총련의 기자들, 외신기자들, 그리고 조선에 체류하고있는 해외동포들이 방청으로 참가하였다.
먼저 김광혁씨가 발언하였다.
그는 자기의 지난날이 너무도 죄스럽고 수치스러워 얼굴을 들수 없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정말 뭐라고 속죄하였으면 좋을지 모르겠다.
나는 지난 시기 학습과 조직생활을 하기 싫어하였다.
그러다나니 고난의 행군시기 일시적인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비법월경까지 하였다.
그후에도 돈에 눈이 어두워 2008년 3월 또다시 몰래 비법월경하였다.
중국에서 여기저기 헤매다가 김희산이라는 자를 알게 되였다.
후에 알게 되였지만 그 자는 남조선괴뢰들과 결탁하여 조선주민들을 남조선으로 끌어가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거간군이였다.
당시 나는 병에 걸려있었는데 어느날 그 자가 찾아와 남조선에 가면 병도 고칠수 있고 돈도 마음대로 벌수 있다고 꼬드겼다.
그리고 식당에서 음식과 술까지 사먹이면서 남조선에 대한 환상을 불어넣었다.
처음에는 남조선으로 간다는것이 조국을 배반하는 길이였기에 선뜻 결심하지 못하였다.
이것을 알아차린 놈은 집요하게 회유하였다.
신념이 확고하지 못하였던 나는 그 자의 얼림수에 넘어가 남조선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그 자는 남조선에 있는 어떤 자와 전화로 《보증인》이 어떻고 돈이 얼마고 하면서 한참 쑥덕거리고나서 이제는 다 됐다고 하는것이였다.
그러면서 남조선에 가면 그 대가로 자기에게 돈을 얼마 주겠다는 보증서를 쓰게 하였다.
이 거간군들은 괴뢰정보원 놈들의 조종밑에 조선주민들을 남조선으로 끌어가고는 당국에서 돈을 받고 월남도주한 자들에게서도 돈을 빨아내며 이중으로 돈벌이를 하고있다.
그후 나는 이놈 저놈의 손으로 계속 넘겨지면서 중국 곤명에 갔다.
안내자를 따라 어느한 산골짜기에 있는 집에 가니 거기에는 여러명의 우리 사람들이 와 있었다.
그들을 끌고온 거간군들은 여기서도 우리에게 남조선에 가면 일인당 돈을 얼마씩 바쳐야 한다고 하면서 채용증에 손지장까지 찍게 하였다.
그리고는 수시로 남조선과 전화로 련계를 가지면서 초소와 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며 우리를 타이의 방코크에 끌고갔다.
거기에 도착한 우리는 남조선에서 온 자를 따라 어느한 건물에 가서 하루밤을 지낸 다음 《난민수용소》라는데로 끌려갔다.
《난민수용소》는 타이에 불법입국하는 사람들을 관리처리하는 곳인데 남조선괴뢰들은 우리 사람들을 남조선으로 끌어가기 위해 거기에 방들을 사두고있었다.
《난민수용소》에서 사람들은 그야말로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며 참을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
어느날 타이주재 남조선대사관에서 왔다고 하는 두놈이 나를 찾아와 사진을 찍고 어디서 왔는가를 확인하였다.
그로부터 보름쯤 지나 비행기에 실려 남쪽땅으로 끌려갔다.
이어 김광혁의 안해 고정남이 발언하였다.
그는 우리 사람들을 남조선으로 끌어가기 위한 괴뢰들의 책동은 참으로 교활하고 집요하다고 하면서 이렇게 계속하였다.
나는 장사에만 눈이 어두워 다니다가 어느날 시장에서 안호근이라는 자를 만나게 되였다.
그 자로 말하면 우리 제도에 대한 앙심을 품고 사람들을 비법월경시켜 남조선괴뢰들에게 넘겨주는 놈이였다.
그 자는 처음에 나의 환심을 사보려고 옷가지들을 사주었다.
나는 점차 그놈을 믿게 되였으며 나중에는 중국에 가서 돈을 벌자는 꼬임에 홀리워 2008년 9월에는 비법월경까지 하였다.
그후 그 자는 나에게 남조선에 대한 환상을 불어넣기 시작하였으며 돈벌이감을 마련하겠으니 기다리라고 하면서 나를 계속 붙들어놓았다.
그동안 나는 그 자가 안내해준 집에 숨어있으면서 남조선TV극과 색정적인 노래들을 보고 들었다.
그 과정에 남조선에 대한 호기심과 환상이 싹트게 되였고 또 안호근은 남조선에 가면 많은 돈을 벌수 있다고 계속 나발을 불어댔다.
나는 그 말에 넘어가 남조선에 가면 잘사는 사람과 결혼하여 돈도 많이 벌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였다.
이렇게 남조선에 대한 환상에 빠진 나는 그 자의 말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후 나는 안호근의 소개로 남조선에 있는 김경희라는 녀자의 조종과 그가 뿌리는 돈에 매수된 거간군들에 의해 타이까지 가게 되였다.
타이에 이르자 김경희는 나에게 전화로 이제는 북으로 끌려갈 위험이 없으니 안심하라고 하면서 남조선으로 오면 자기에게 그동안의 비용과 대가를 지불하여야 한다고 오금을 박았다.
나도 타이의 《난민수용소》에서 두달가량 갇혀있다가 남조선괴뢰들의 조사를 받고 남쪽으로 끌려가게 되였다.
이렇듯 남조선괴뢰들은 해외각지에 저들의 앞잡이들을 거미줄처럼 늘어놓고 그들을 통해 우리 사람들을 남조선으로 끌어가는 놀음을 계획적으로 벌리고있다.
남조선에서 비참한 생활을 겪으면서 비로소 놈들에게 속히웠으며 거기에 있어야 죽음밖에 차례질것이 없다는것을 깨닫고 삶의 진정한 보금자리를 찾아 어머니조국의 품에 안기게 되였다.
이어 그들은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였다.
조선중앙방송위원회 기자:조선주민들을 남조선으로 끌어가기 위한 리명박패당의 교활한 회유기만책동의 일단이 다시금 만천하에 드러났다고 본다.
김광혁부부가 남조선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고 하는데 그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주었으면 한다.
대답(고정남):사실 우리는 남조선에 가면 잘 먹고 잘 살수 있을것이라고 어리석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정작 남쪽땅에 가보니 남조선이야말로 빛좋은 개살구였고 썩을대로 썩은 사회였다.
TV에서 나를 유혹하였던 화려한 생활은 모두 거짓이고 기만이였다.
내가 살게 되여있던 광주시의 집만 보아도 그렇다.
매우 낡은 쪽방인데다가 구석마다 곰팡이가 끼여있고 사방 거미줄이 늘어져있는가 하면 벌레들이 기여다니고 악취까지 풍기였다.
지금껏 환상속에 그려보았던 집이 과연 이런 시궁창같은것이였는가 하고 생각하니 억이 막히고 눈물이 났다.
소름끼치는 그 집에서 살수 없어 다음날로 뛰쳐나왔다.
그후 나는 변변한 거처지가 없이 떠돌아 다니지 않으면 안되였다.
현재 남조선에서는 《탈북자》들의 95%이상이 제집이 없이 세방살이를 하고있다.
《탈북자》들에게 있어서 집은 더 말할것도 없고 하루 한끼 제대로 먹는것도 문제이다.
언제인가 TV로 《탈북자》자매가 산속에서 짐승처럼 등산객들이 먹다버린 음식찌꺼기를 씹고 일년내내 오물을 주어먹으며 한지에서 나무잎을 덮고 살고있는데 대하여 울분을 토하는것이 방영된적이 있다.
나의 처지도 크게 다를바 없었다.
굶기를 밥먹듯 하였고 남이 쓰다버린 물건짝들도 주어모았다.
남조선에서 《탈북자》들에게 명색상 생계비라는것을 준다.
그러나 그것은 한몸도 지탱하기 어려운 보잘것없는 것인데다가 그나마 결혼하거나 아무 직업이나 구하면 즉시에 자동적으로 끊기우고 만다.
어떻게 하나 살아보려고 가정을 이루었으나 결혼신고서를 내자마자 생계비가 끊기였다.
우리 두명의 생계비를 다 합쳐야 한달 세금이나 겨우 낼 정도였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였다.
남조선에서는 아이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말처럼 세금종류가 헤아릴수 없이 많고 그 돈 또한 생눈알을 뽑아먹을 정도이다.
우리는 고민끝에 가정을 이룬지 두달도 못되여 다시 생계비를 얻기 위해 형식상의 리혼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렇게 생계비라는것은 《탈북자》들을 살려주는것이 아니라 가난에 쪼들리게 하고 직업도 가정도 제대로 가질수 없게 하는 무서운 올가미이다.
대답(김광혁씨):직업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남조선에서 《탈북자》들이 일자리를 구한다는것은 하늘의 별따기이다.
나와 안해는 생계비로는 도저히 살수 없어 직업을 구하면 좀 나을가 하여 여기저기 찾아 헤매였다.
하지만 가는곳마다에서 《탈북자》라는 리유로 매번 거절당하였다.
우리는 끝내 똑똑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손전화기부분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시간별로 일하는 일거리를 겨우 잡았다.
회사측에서는 나에게 누구도 하기 꺼려하는 제일 위험하고 힘든 일만 골라 시키였다.
그리고 안해에게는 3명이 해야 할 일감을 주면서 보수는 한명분만을 주었다.
회사의 불공평한 처사에 참지 못하고 하루는 내가 작업하던 손전화기를 바닥에 둘러메치며 왜 돈을 적게 주는가고 들이대였다.
그러나 회사측은 눈섭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런것들이 어디서 왔는가고 하면서 우리를 내쫒았다.
대답(고정남):그후부터 남편은 썩어빠진 남조선땅에 왜 왔는가고 울분을 토하면서 늘 술에 취해있었고 그로하여 병까지 도지였다.
남조선에서 《탈북자》들은 온갖 랭대와 따돌림으로 하여 우울증과 정신장애를 비롯한 각종 병마에 시달리고있다.
나도 직업을 구해보려고 온갖 고생을 다하였다.
남의 집 아이보개도 해보고 쓰레기를 버리는 일도 해보았으며 위생실청소도 해보았다.
남편이 앓아 누운데다가 임신까지 하게 되자 살아갈 길이 더욱 막막해진 나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대구에 있는 한 간호학원에 들어갔다.
간난신고끝에 학원에 들어갔으나 거기에서 당한 수모와 멸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잠을 이룰수 없다.
교원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수 없어 다른 학생들에게 물어보아도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점심식사도 따로 해야 하였다.
같이 식사하게 되는 경우에도 남쪽사람들은 내가 마련해간 음식에는 독약이라도 친것처럼 애당초 수저를 대려고 하지 않았다.
환자들마저 《탈북자》한테서는 주사를 안맞겠다고 하면서 눈까지 흘기며 피해버리는 정도였다.
그 모든 랭대와 멸시속에서도 나는 자격증만 손에 쥐면 직업을 얻을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해산한지 열흘만에 손과 얼굴이 퉁퉁 부어 오른 상태에서도 학원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온몸에 스며드는 차디찬 바람을 이겨내며 학원으로 가야만했던 나의 가슴속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때 일로 하여 지금도 산후탈로 고생하고있다.
병까지 얻으며 손에 쥔 자격증도 휴지쪼각이나 마찬가지였다.
살기가 힘들어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싶어서가 아니라 돈을 준다고 하기에 나중에는 교회당에까지 찾아다니였다.
월남도주자들의 처지는 이처럼 참혹하다.
《탈북자》들은 자기들의 불행한 처지를 절망하다가 타락하여 범죄의 길에 들어서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고있다.
남조선에서 신문을 보았는데 《탈북자》들의 범죄률은 남조선주민들에 비해 2배이상이나 되고 자살률은 3배나 높다고 하였다.
이처럼 남조선은 절대다수의 근로대중이 살수 없는 인간생지옥이며 더우기 《탈북자》들에게는 한치의 발도 붙일수 없는 불모의 땅이다.
조선중앙통신사 기자:지금 리명박역적패당은 월남도주자들을 내세워 반공화국인권모략책동에 열을 올리고있다.
이에 대해 남조선에서 직접 체험하였거나 보고 들은 사실들이 있으면 말해주기 바란다.
대답(김광혁씨):남조선TV와 방송에서는 《탈북자》들을 내세워 조선을 비방중상하는 보도가 계속 나오고있다.
《탈북자》들의 얼굴을 가리우거나 이름을 밝히지 않은채 조선을 헐뜯고 사람들의 인식을 흐리게 하는 거짓말을 계속 떠들어대고있다.
TV에서는 악질《탈북자》단체들이 조선을 모해하는 삐라를 뿌리기 위해 군사분계선지역에 나갔다가 그곳 주민들의 항의를 받고 싸움까지 벌리는 장면들도 비치군하였다.
괴뢰당국은 《탈북자》단체의 개별적인 활동이요 뭐요 하면서 자기들은 상관이 없는것처럼 놀아대지만 실지는 돈까지 대주며 적극 부추기고있다.
괴뢰들은 돈을 미끼로 《탈북자》들을 반공화국모략단체들에 끌어들이거나 《증인》으로 둔갑시켜 《강연》이니 《전시회》니 하는것들을 계속 벌려놓고있다.
《탈북자》단체들은 돈벌이를 위해 저저마다 미국의 후원을 받는다,어쩐다 하며 열을 올리고있다.
올해 7월 전영철이 조선에서 특대형파괴행위를 감행하려다가 체포되였다는 소식을 들고 사람들은 매우 분격해하였다.
대답(고정남):괴뢰들은 《탈북자》들이 남조선에 발을 들여놓기 바쁘게 괴뢰정보원과 《하나원》에 몇달씩 가두어놓고 반공화국모략책동에 써먹기 위한 교육을 주입시킨다.
내가 괴뢰정보원에 갇혀있던 때의 일이다.
《탈북자》들은 하루종일 끈질긴 조사를 마치고 나서 감방에 오면 또 조선을 헐뜯는 선전록화물을 보아야 한다.
하루는 6.25전쟁을 북에서 일으켰다는 내용의 록화물이 나왔는데 사람들이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모두 보지 않았다.
나도 놈들의 취조에 지쳐 쓰러진채 눈을 감고있었다.
감방에 설치된 감시카메라를 통해 그 광경을 본 놈들이 방에 들이닥치더니 밤새 재우지 않고 위생실청소를 시키는것이였다.
《하나원》에서는 매일 조선을 헐뜯는 《강연》놀음을 벌리고있다.
또한 사람들에게 조선을 비방중상하는 글들을 쓰게 하고는 점수에 따라 돈을 주고있다.
남조선에는 종종 사람들이 문학작품을 쓰면 돈을 얼마큼씩 준다는 광고가 여기저기에 나붙는데 조선을 헐뜯는 내용들이거나 《탈북자》들이 쓴것이면 우선적으로 당선시킨다.
지난해 12월 19일 담당형사가 전화로 푸짐히 먹을 일도 있으니 우리 부부를 몇시까지 어디에 오라고 하는것이였다.
가고싶지 않았지만 가지 않으면 또 못살게 굴것 같아서 집을 나섰다.
거기에 가니 우리뿐아니라 다른 《탈북자》들도 와 있었다.
영문도 모르고 식탁을 마주한 우리는 천만뜻밖에도 위대한 장군님께서 서거하시였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되였다.
나라와 인민을 위해 모든것을 바치신 장군님께서 뜻밖에도 서거하시였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통곡을 해도 씨원치 않을 그 자리에 음식상까지 차려놓고 우리를 끌어들인 놈들이야말로 천하에 무뢰한들이고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쓴 짐승들이였다.
이렇게 리명박패당은 월남도주자들을 내세워 조선을 반대하는 대결모략책동을 악랄하게 감행하고있다.
리명박패당이 조선주민들을 남조선으로 끌어가는것은 다름아닌 조선의 영상을 흐려놓고 저들의 대결정책을 합리화하기 위한데 있다고 생각한다.
통일신보사 기자:김광혁부부가 어떻게 되여 조선으로 다시 돌아올 결심을 하게 되였는지 그에 대해 말해주었으면 한다.
대답(김광혁씨):우리가 조선으로 다시 돌아올 결심을 하기까지는 정말 쉽지 않았다.
나는 남조선에서 돈도 벌고 가정도 이루면 잘 살수 있을것이라고 망상하였다.
그래서 고난의 행군시기 중국에 비법월경하였던 어머니까지 남조선으로 오게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곁에 있고 가정도 있었지만 살길은 갈수록 막막해졌다.
도저히 살래야 살수 없는 비참한 현실을 잊어보려고 술에 취하기도 하였지만 허사였다.
앓고있는 나와 아들을 살려보겠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안해의 처절한 모습을 볼 때면 막 미칠것 같았다.
나의 머리속에는 우리같은 사람들은 도저히 발붙일수 없고 어디에 하소연도 할수 없는 부정의한 사회,가는곳마다에서 랭대와 멸시만 받아야 하는 불평등한 사회,인간의 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개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하는 절망뿐이였다.
정말 남조선은 돈과 약육강식이 판을 치고 인간의 초보적인 삶과 생존권마저 무참히 짓밟히며 앞날에 대한 희망조차 기대할수 없는 암흑천지이고 인간생지옥이다.
하기에 나는 어리석은 환상에 빠져 남조선에 온 자신을 끝없이 저주하면서 후회하고 또 후회하였다.
더는 그 더러운곳에 있고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벌을 받더라도 조국으로 다시 가자는 결심을 안해에게 터놓게 되였다.
대답(고정남):그때 애아버지의 말에 나도 선뜻 찬성하였다.
사실 나는 남쪽에서 살려고 간것이 아니였다.
돈을 벌어볼가 하다가 얼리워 남조선으로 끌려갔기때문에 조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속에 날을 보내였다.
광주의 소름끼치는 집에서 하루밤을 보낼 때도 아이를 낳을 때도 《탈북자》라고 참혹한 랭대와 멸시를 당할 때도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며 조국으로 돌아가고싶은 생각뿐이였다.
그래서 나는 남편의 결심을 듣는 순간 기뻤다.
우리가 조국으로 가야 하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히게 된것은 아들이 태여나서부터였다.
고통과 괴로움을 주는 《탈북자》라는 딱지는 자식에게까지 악착스럽게 달라붙는다.
남쪽에서는 《탈북자》자녀라고 하면 어디가나 따돌림을 당하고 학교에서는 매를 맞고 몰리워 아이들이 집밖에 나가는것도 꺼려하고있다.
그러다나니 《탈북자》자식들은 무섭기도 하고 마음까지 이그러져 학교에 제대로 다니는 아이가 거의 없다.
《탈북자》자식으로 멸시받으며 사는것이 너무도 고통스럽고 절망과 비관에 빠져 탄불을 피워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아이들도 있다.
우리 자식도 그렇게 될가봐 두려웠다.
더우기 《탈북》녀성들이 당하는 비참한 현실은 남조선에 대한 나의 환멸과 증오를 더욱 불러일으켰다.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고 유흥업소들에 끌려가 성노리개로 유린당하다가 무주고혼의 신세를 면치 못하는것이 《탈북》녀성들의 비참한 운명이다.
변태적인 남조선사회에서 의지할데 없는 《탈북》녀성들은 야수의 무리속에 던져진 먹이감에 불과하다.
남조선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니 지금 남조선에 끌려간 사람들의 80%이상이 자기들의 불행한 처지에 울분을 금치 못하면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있다.
조선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 우리는 그때부터 필요한 준비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조국에 대한 소식도 알아보았다.
그러던 어느날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께서 경상유치원을 현지지도하시는 영상을 모신 록화물을 보게 되였다.
환한 미소를 지으시며 원수님께서 우리 아이와 같은 어린이들을 한품에 안으시고 사랑의 기념사진도 찍어주시였다.
원수님께서 어찌나 애들을 고와하시는지 저희부부는 그 모습을 뵈오면서 저도모르게 울었다.
애아버지는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아이들을 고와하시는것을 보니 수령님과 장군님생각이 난다고,수령님과 장군님께서도 한평생 우리 아이들을 얼마나 고와하시였는가고 하면서 울먹이였다.
저희들은 원수님의 영상을 모신 록화물을 몇번이고 반복하여 보면서 우리 아이도 원수님품에 안기게 하자고 다짐하였다.
그러나 저희들 마음한구석에는 죄많은 우리를 조국에서 어떻게 받아주겠는가 하는 불안과 걱정이 무겁게 자리잡고있었다.
괴뢰들은 《탈북자》들이 북에 돌아가야 감옥에 가고 목숨도 담보할수 없다고 악선전을 하고있다.
우리에게 조국으로 갈 결심을 더해준것은 남조선에 끌려갔다가 공화국의 품에 다시 안긴 박정숙녀성의 기자회견소식이였다.
조선에서는 그의 과거를 묻지 않고 너그러이 안아주었을뿐아니라 좋은 집까지 마련해주고 아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도록 해주었다.
그 소식은 《탈북자》들속에서도 커다란 화제거리가 되였다.
박정숙녀성의 기자회견소식을 듣고 우리의 결심이 천만번 옳았다는것을 다시한번 확신하였다.
그래서 중국에 다녀온다고 하면서 그 더러운 남쪽땅을 빠져나와 그토록 오고싶던 어머니조국의 품에 안기였다.
총련조선신보사 기자:김광혁부부가 어머니와 함께 조선에 오지 못하였는데 남쪽에 있는 어머니에게 하고싶은 말이 있으면 해주었으면 한다.
대답(김광혁씨):우리가 조국으로 오면서 제일 마음에 걸린것은 어머니였다.
남조선을 떠날 때 어머니에게 조국으로 간다는 말을 차마 할수 없었다.
《탈북자》들의 일거일동을 매일매시각 감시하는 그 삼엄한 남쪽땅에서 잘못하다가는 우리의 계획이 드러날수 있고 그 경우 우리 운명은 영영 끝장나게 되기 때문이였다.
그래서 나는 중국 심양에 도착해서야 전화로 어머니에게 조국으로 간다는것을 알리였다.
저는 어머니에게 용서하십시오,나도 처도 아이도 더 이상 남쪽에서 살래야 살수 없습니다,조국에 가서 마음편히 살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어머니는 놀라와하면서도 나의 결심이 확고하다는것을 알고는 더 말을 못하고 울기만 하였다.
어머니는 그 험악한 세상에서 나를 위해 할수 있는 모든것을 다하였다.
그러나 나의 운명은 지켜주지 못하였다.
우리 공화국이 나의 친어머니도 주지 못한 사랑과 정을 주고 운명과 미래까지도 다 맡아 지켜주고 빛내여주는 따사로운 품이라는것을 나는 너무나 늦게야 깨닫게 되였다.
대답(고정남):우리가 죄스러운 마음을 안고 평양비행장에 내렸는데 뜻밖에도 해당 일군들이 나와 따뜻이 손잡아주며 반갑게 맞아주는것이였다.
우리가 남조선으로 갈때는 다른 사람들이 볼세라 야밤삼경에 비행기에 짐짝처럼 실려 뒤자리에 숨어있어야 했고 내려서는 어두침침한 좁은 통로로 죄인처럼 호송되여 괴뢰정보원으로 끌려갔다.
조국에 도착하여 꿈결에도 보고싶던 부모형제들과 감격적인 상봉도 하였고 부모와 함께 행복하게 살 살림집까지 받았다.
정말 모든것이 꿈을 꾸는것만 같다.
대답(김광혁씨):조국을 위해 한일도 없고 죄되는 짓밖에 한것이 없다.
그러나 조국은 죄많은 우리를 따뜻한 품에 너그러이 안아주었다.
진정 그 품은 우리 가정의 운명도 미래도 다 맡아 보살펴주시는 어머니조국이며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의 자애로운 품이다.
그는 인덕의 최고화신이신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께 다함없는 감사의 인사를 삼가 올리였다.
김광혁씨는 남쪽에 있는 어머니와 모여살 그날을 기다리겠다고 하면서 자기 가정의 은인이시며 사회주의대가정의 자애로운 어버이이신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께 충정을 다하며 강성국가건설에 이바지할 결의를 표명하였다.
그의 안해도 기자회견을 통하여 남조선괴뢰들에게 속히워 끌려간 사람들에게 말하고싶다고 하면서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저주로운 남조선사회와 결별하고 주저없이 공화국으로 돌아오라고,그 길만이 자기의 존엄과 참된 삶을 찾는 길이라고 말하였다.
통신은 자기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조선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용서하고 따뜻이 안아주고있다고 전하였다.
(조선신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