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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꼬마》꾀꼴새와 29년만의 상봉

2012년 10월 23일 16:18 문화・력사 주요뉴스

나는 1983년 고급부 2학년시기 조일친선의 꽃사절로 일본을 방문한 제2차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의 녀성중창조 꾀꼴새 전국화와 깊은 우정을 맺었다. 이번에 조선대학교 교육학부 보육과 학생들을 데리고 조국을 방문(8월 25일∼9월 22일)하여 그와 실로 29년만의 상봉을 이루었다.

평양개선유치원 교양원, 조대 학생들과 함께

대선풍 일으킨 《평꼬마》

《평꼬마》로 불리운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은 1978년에 처음으로 일본땅에 와서 대선풍을 일으켰다.

그후 1983년에 제2차, 1986년에 제3차 예술단이 일본 방방곡곡에 조국의 향기를 듬뿍 뿌리고 갔다.

1983년 일본을 방문한 제2차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의 녀성중창조(오른쪽에서 7번째가 전국화소녀)

2002년 10월 청상회의 초청으로 조일수뇌회담이후 첫 친선예술사절인 제4차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이 일본에 오기로 되여있었으나 일본정부가 《랍치》문제를 기화로 더욱 반공화국책동에 미쳐날뛰던 때라 중국까지 나간 예술단의 일본공연은 유감스럽게도 실현되지 못했었다.

우리 동포들에게 힘과 용기를 안겨준 학생소년예술단. 나는 그들과 떨어지고싶지 않아 계속 공연지를 따라다니군 하였다. 어찌 나뿐이랴. 당시 우리 동창생들, 또래들이 다 그랬다.

도꾜에서의 마지막 공연은 도꾜조선문화회관에서 진행되였다. 꼬마독창가수 전혜영이 《조국의 사랑은 따사로워라》를 울면서 부르다가 장내를 온통 울음바다로 만들어놓은 잊을수 없는 공연이였다.

공연후 안마당에서는 춤판이 벌어졌다. 나도 전국화랑 예술단 성원들과 손잡고 춤을 추었다.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못내 헤여지기 아쉬워하였다. (우리는 왜 헤여져 살아야 할가?) 친혈육과도 같은 정이 끓어넘쳤다. 우리는 눈물속에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통일의 그날 다시 만날 굳은 약속을 하였었다.

제2차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은 나의 청춘시절 추억과 함께 가슴속 깊이 간직된 둘도 없이 귀중한 벗들이고 혈육이고 조국의 숨결이였다.

7년전에 알게 된 《소식》

어느덧 세월은 흘러 나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 교단에 서서 분망한 나날을 보내다나니 그들과 편지 한장 주고받지 못하였었다.

《소식》을 알게 된것은 7년전이였다.

조국강습기간 보육과 학생들의 입말기량을 높이기 위해 평양개선유치원 홍미야선생이 나와서 실기지도를 해주었다.

어느날 홍미야선생이 불쑥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것이였다.

《전국화 알지요?》

《전국화, 전국화라… 아, 예.》 나는 얼결에 대답하고말았다.

《선생님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예?》

나는 선뜻 그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벌써 20년 남짓한 세월이 흘렀다.

추억을 더듬던 나는 궁금하여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전국화를 알아요?》

《우리 유치원에 같이 있습니다.》

알아본즉 국화가 지금 개선유치원에서 교양원을 한다는것이였다.

그리움은 샘솟듯 하였으나 그때까지만 하여도 우리 보육과는 평양신리유치원에서 실습을 하였으므로 만날수가 없었다.

아쉬움을 금할수 없었지만 귀중한 친구를 다시 찾게 된 기쁨과 놀라움으로 밤새 잠들수 없었다.

그런데 운명의 필연이랄가 5년전부터 보육과 실습원이 옛 친구가 있는 평양개선유치원으로 바뀌여질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하려는것처럼…

그러나 그간 아이가 어려서 조국연수 인솔은 하지 못했었다.

29년만의 상봉을 이룬 필자(오른쪽)와 전국화교양원

기쁨 나누며 함께 부른 노래

그때로부터 어언 7년세월이 흘렀다.

오랜만에 학생들을 데리고 조국연수의 길에 오른 나는 9월초에 한발 앞서 실습협의를 하러 원장을 찾아갔다.

통성명을 하라는 지도원의 말을 막고 원장이 《우리는 이미 다 알고있습니다. 맹복실선생님이지요? 》

《?》

나는 영문을 몰라 눈을 껌벅거리였다.

《아직 국화선생에게는 말 안했어요. 모르고있어요.》

나는 가슴 울렁거림을 억누르지 못했다.

드디여 교육실습날이 왔다.

학생들은 아침부터 긴장과 불안에 휩싸여있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한척 하던 내가 사실은 제일 안절부절 못해있었다.

원장옆에서 학생들을 바라보며《나》를 찾는 그의 모습을 나는 대뜸 알아보았다.

우리는 얼싸안았다.

지난 29년간이 한순간에 메워진듯 우리는 이렇다 할 말도 없이 서로 부둥켜안고 마주 보기만 했다.

유치원 원아들, 교양원들만이 아니라 학부모들까지 우리를 환영하여 지켜보는가운데 우리 학생들은 원이 되여 춤을 추었다. 나도 국화네 반 어린이들과 춤을 추었다.

실습기간 우리 학생들은 우리 나라 보육제도에 대한 강의를 받고 유치원 견학, 보육참관을 하면서 어린이들을 나라의 왕으로 떠받드는 사회주의보육제도에 대하여 잘 배웠고 아이들을 위해 교양원들이 손수 만들어낸 정교한 교구비품들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실습 마지막날 유치원에서는 조국아이들의 《선생님》이 되여 실습을 성과적으로 끝낸 우리 학생들을 위해 점심식사를 정성껏 차려주었다.

생선회며 전골, 삶은 고구마, 과일은 다 별맛이였다.

그후 오락회도 하고 이야기꽃도 피웠다.

교양원들의 공연에 이어 우리 학생들도 조국에서 배운 노래랑, 춤이랑 엮어서 답례공연을 잘했다.

그러다가 오락회는 자연스레 《독창대회》로 넘어가 사회자가 마지막으로 나를 지명하였다.

일제히 바라보는 시선들중에서 나는 국화와 약속이나 한듯 눈이 맞았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개선유치원에는 평양학생소년예술단으로 일본에 와서 우정을 맺은 꾀꼴새 전국화선생이 있습니다. 29년만에 만난 국화선생과 상봉의 기쁨을 나누며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우리가 정한 노래는 《조국의 사랑은 따사로와라》

그런데 이를 어쩌나!

♪나라에서…

우리는 한소절도 채 넘기기 전에 서로 목이 메여 부르지를 못했다.

29년만의 상봉에 많은 말은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노래를 불렀다. 하염없이 볼을 타고 내리는 눈물을 닦을념도 않고…

장내에서도 흐느낌소리가 났다.

우리 학생들의 눈가에도 조국 교양원들의 눈가에도 이슬이 맺혔다.

노래는 다같이 합창으로!

두분의 위대한 령도자를 모시여 실현된 꽃사절들의 일본방문.

오늘 김정은원수님을 모시여 이루어진 29년만의 뜻깊은 상봉.

◇          ◇

지금도 꿈만 같다.

우리가 만나 회포를 나눈 시간은 얼마 안된다.

내가 16살때(국화 15살) 일본에서 만나 알고 지낸 시간도 길지는 않다.

서로 헤여져있던 29년세월이 더 길고 오래다.

하지만 바다건너 이루어진 우리의 우정은 변함없이 뜨겁고 진실하고 참다운것이다.

조국을 위한 길에, 민족교육을 위한 길에 내가 떳떳이 서있는한 우리는 동지로, 참다운 인생의 길동무로 맺어질수 있는것이리라.

(맹복실 조선대학교 교육학부 언어교육강좌 강좌장,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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