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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통신, 《일제의 표준시간강탈책동을 묵과못한다》

2012년 06월 25일 17:45 공화국

조선중앙통신사는 25일, 일제가 조선의 표준시간을 강탈해서 100년이 지난것에 즈음해서 다음과 같은 론평을 발표하였다.

일제가 조선의 표준시간을 강도적으로 빼앗은 때로부터 100년이 흘렀다.

과거와 현재, 미래로 끊임없이 계속되는 객관적존재형식이며 국가와 사회활동의 필수적요소인 시공간의 합법적기준을 한 민족에게서 말살한것은 극악한 일본의 《황국신민화》책동의 일환이다.

원래 우리 민족이 써오던 표준시간은 1884년부터 국제천문학계의 결정에 따라 영국의 그리니치천문대의 자오선을 중심으로 동경 127°30′을 기준한것이다.

일제는 1905년 강도적인 《을사5조약》을 날조하여 조선의 내정권,외교권을 완전히 강탈한후 조선민족이 종래로 써오던 표준시간을 무시하고 본국의 시간에 맞추도록 강박하였다.

민족문화유산인 《앙부일구》(해그림자로 시간측정하는 기구)를 비롯한 시간측정기구와 설비들을 략탈해가는 한편 1906년부터는 조선에 진주한 저들의 관청기관들부터 일본시간을 사용하게 하였다.

조선강점통치시기 점차적으로 일본시간활용을 늘이다가 1912년 1월 1일부터 전조선지역에서 일제히 일본표준시간을 사용하도록 《조선총독부》의 지령을 하달하였다.

《총독부》가 출판한 《시정25년사》가 발표한 《기상관측 및 조선민력》의 첫 항목에 기재된 《내선표준시의 통일》자료는 이에 대한 방증으로 된다.

《명치 39(1906)년 6월 2일 반도에 있어서 일본제국의 여러 관청들만 일본표준시를 사용하였고 명치41(1908)년 4월 1일 이후는 반도에서 일한량국 관청은 다같이 제국중앙표준시에 대하여 30분의 시차를 두고 표준시로 삼았으나 병합(1910년)후 내지와의 관계가 더욱더 밀접해지고 상호의 교통이 빈번해지는데 따라 그것을 통일할 필요를 인정하여 명치45(1912)년 1월 1일부터 조선의 표준시는 중앙표준시에 맞추도록 하였다.》

일제의 표준시간강탈책동은 조선을 영원한 식민지로 만들려는 침략적목적으로부터 출발한것이다.

일제는 조선의 국권을 강탈한 첫 시기부터 조선인민을 철저히 노예화하는것을 시책으로 삼고 통치기구들을 총발동하였다.

조선황제의 통치권은 일본왕에게로 모조리 넘어갔고 백성들은 《총독제령》에 따라 움직이는 현대판노예가 되였다.

일본왕의 칙령에 따라 《총독》은 조선에서 륙해군의 통솔권을 비롯하여 우리 민족의 귀와 입을 틀어막고 손발을 얽어맬수 있는 무제한한 권한을 가지였다.

일제는 조선사람들에게 《내선일체》와 《동조동근》사상을 강제로 불어넣어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그들을 《황국신민화》하려 하였다.

이를 위한 책동의 하나로 일본의 표준시간에 준하여 《정오묵도》를 강요하였다.

정오에 고동이 울리면 조선과 일본의 모든 주민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일본왕이 있다는 궁성을 향하여 절을 하는 《궁성요배》를 하며 학생들은 아침 8시가 되면 학교정문의 나무말뚝에 붙인 《궁성》사진을 향하여 절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일제는 《조선사람들이 자기의것, 력사전통에 대해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의 혼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일본문화를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것이다.》고 내놓고 떠벌였다.

일제에게 말과 글, 지어 성까지 빼앗기고 일본시간에 맞추지 않으면 살아갈수 없은것이 당시 우리 민족에게 강요된 비참한 운명이였다.

표준시간강탈책동을 비롯하여 조선인민에게 감행한 일제의 범죄적죄행은 세월이 흐르고 강산이 변해도 절대로 잊혀질수 없으며 천백배로 결산될것이다.

(조선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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