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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련 제22차 전체대회〉 토론(요지) -상-

2011년 06월 22일 02:16 주요뉴스

민족교육사업에서부터 전환을 일으켜 애족애국운동의 새 전성기를 앞장서 열어나갈데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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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련도꾜조직과 동포사회에 있어서 2만명을 넘는 민족인재를 키워온 우리 학교, 우리 민족교육은 말그대로 모든것의 출발점이며 중심중의 중심사업이다.

그런데 최근년간 학생수가 크게 줄어들고 학교운영이 어려워지자 모두들 걱정은 했으나 이것이 동포사회의 존속과 재일조선인운동의 전망과 관련된 문제로서 지금 당장 제동을 걸지 않으면 먼 후날 무서운 후과를 초래할것이라는데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있었다.

우리 일군들은 《할 일은 다하고있다.》, 《대상아이가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하고 학생수감소를 《막을수 없는 흐름》으로 여기군 하였으며 지난해말까지만 하더라도 올해는 각별히 대상아이가 적은 해이니 아무리 발버둥쳐도 더이상 늘일수 없다고 하여 그냥 주저앉으려 하고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올해 들어 새해축전을 거듭 학습하고 토론을 깊이는 과정과 특히는 총련본부위원장회의를 통하여 오늘날 민족교육이 처한 위기적상황을 극복하고 역전시키지 않고서는 도꾜사업은 한걸음도 발전시킬수 없다, 새 전성기는 민족교육사업에서부터 열어나가야 한다는 정책적요구성을 깊이 틀어잡게 되였다.

우리 본부는 《90일운동》의 첫날인 2월 10일부터 3월 31일까지의 50일동안에 학생인입대렬을 끝까지 확대해나갈것을 결심하였다.

김정일장군님께서 영웅으로 내세워주신 니시도꾜조선제2초급학교 리정애교장의 고결한 정신세계와 무비의 헌신성, 《하면 된다》는 불퇴전의 각오를 따라배운 본부일군들은 27명의 인입대상중 16명의 대상을 직접 분공맡아나섰다.

본부위원장인 나도 3명의 어려운 대상을 맡아 사업하였다.

총련지부위원장들도 지난 시기 없는 비상한 열의를 안고 떨쳐나섰다.

총련 아라까와지부에서는 학생인입사업을 놓고 상임위원회에서 거듭 토의하여 《90일운동》기간에 새로 5명을 더 받아들여 목표를 135%로 달성하였다.

17개의 청상회는 지역동포사회에 파묻혀 살고있는 조고, 조대졸업생들을 찾아내고 련계를 깊여 학령전어린이를 가진 부모들과의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 성과를 거두었다.

지난 시기 학부모들의 요구에 따라 《연장보육》, 《방학간보육》, 《학동보육》까지 맡아나서며 학생인입사업에서 중심적역할을 놀아온 도꾜조선제1초중급학교 유치반집단은 이번에도 말그대로 피타는 노력과 정열을 쏟아부음으로써 원아를 16명 받아들여 전체 원아수를 5명 더 확대하였을뿐만아니라 33명으로 초급부 1학년을 두 학급으로 편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도꾜조선제6초급학교 유치반집단도 《엄마와 어린이모임》을 비롯하여 학령전어린이를 가진 학부모들과의 사업을 전망성있게 벌림으로써 이 학교가 5년련속 학생수를 늘이는데 적극 이바지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본부는 이미 일본학교에 원서를 낸 학생, 민단계학교에 다니던 학생, 국제결혼한 동포집 학생, 인터나쇼날스쿨에 다니던 학생들을 포함하여 끝내 7명의 편입대상을 포함한 15명을 새로 받아들이는 최근 몇해동안에 없었던 참으로 귀중한 경험을 이룩하였다.

나는 지난 기간 78%의 분회를 재건활성화한 성과를 공고히 다지며 기층조직의 조직사상적토대를 보다 튼튼히 구축하여 민족교육을 중심으로 한 애족애국운동을 더욱 새롭게 활성화해나갈것이다.(총련 도꾜도본부 위원장 박창길)

우리 학교사업과 함께 준정규교육망을 확대강화하여 시고꾸동포사회의 민족성을 고수해나갈데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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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고꾸조선초중급학교는 올해에 창립 65돐을 맞이하게 되며 이제까지 730여명의 졸업생들을 내보냄으로써 시고꾸지역의 동포민족권을 고수발전시키는데서 크게 공헌해온 오랜 전통이 있고 자랑많은 학교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안타깝게도 학생수가 20명대로 줄어들어 학교를 고수발전시키는데서 적지 않은 곤난이 조성되였다.

이런 속에서 시고꾸에 단 하나밖에 없는 우리 학교가 자기 사명을 다해나가자면 정규교육과 함께 준정규교육망을 확대강화하는것이 대단히 중요한 과업으로 제기되였다.

우리 교원들은 이 방침과 시고꾸민족교육의 현 상황을 놓고 토론을 거듭한 끝에 가가와현청상회가 주관하는 아동교실과 고찌아동교실, 우리 학교의 토요아동교실을 맡기로 하였다.

사실 학교사업을 보장하면서 3개소의 강사사업을 책임적으로 맡아하자니 어려움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학교에서 고찌까지는 거리가 약 150㎞가 되며 가가와까지는 약 170㎞나 된다.

그러므로 고찌강사를 맡은 교장은 한번 나갈 때면 자동차를 몰고 왕복 5시간 달려야 하며 내가 맡은 가가와에 갈 때는 전날에 현지에 들어가 하루밤을 묵어야만 하였다.

또한 에히메토요아동교실은 5살나이부터 소학교 6학년생까지를 대상삼아 두 교실로 나누어 수업을 진행하므로 인원이 적은 교원력량을 조절하면서 강사사업을 보장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속에서도 우리 교원들은 시고꾸민족교육은 우리가 책임진다는 일념으로 모두가 두몫, 세몫 일을 맡아가면서 이 사업을 보장하고있다.

나는 3년전 고찌의 아동교실을 맡았는데 담임사업, 소조지도사업, 교원내부사업을 하면서 강사사업을 보장하였다.

우리 교원들의 이런 투쟁으로 수강생들과 동포사회에서는 조금씩이나마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수강생들은 우리 말과 글을 배우는것이 재미난다고 하면서 배운 말을 집에서 쓰는가 하면 어떤 수강생은 일본학교 동무들에게 자기의 조선이름 석자를 보란듯이 써보이고 자랑까지 하였다.

학부모들은 변화되여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못내 기뻐하고있으며 《학교사랑1구구운동》에도 참가해주고있다.

그리하여 최근 2년동안에 에히메준정규교육망에서 배운 5명의 아이들을 우리 학교에 받아들이게 되였으며 래학년도에는 고찌에서 14년만에 우리 학교 기숙사에 편입생을 받아들일 전망이 서게 되였다.

오늘 우리는 에히메와 고찌, 가가와의 준정규교육망에 36명의 동포자녀들을 망라하고있다.

나는 우리 학교 학생들은 물론 일본학교에 다니는 동포자녀들도 다 우리의 보배들이라고 자랑하고싶다.

지난해말에 총련중앙은 당시 우리 학교 중급부 3학년이던 조성태학생을 공화국인민체육인칭호를 수여받은 동포체육인들을 축하하는 모임에 불러주고 크게 내세워주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어머니의 손을 잡고 《우리에겐 아버지가 있어. 총련조직이 우리 아버지야.》 하며 눈동자를 반짝이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는 한 학생에 대해 이토록 혈육의 정으로 보살펴주는 총련조직이 하도 고마워 총련중앙에 감사편지를 써보내였다.

학생 한명한명을 위하여 모든 정열과 량심을 다 바쳐 교육하는것이 민족교육의 사명이라는것을 나는 다시한번 가슴에 새기게 되였다.

나는 아이들의 참된 행복과 동포사회의 미래를 위하여 시고꾸동포자녀들의 배움의 보금자리인 우리 학교를 기어이 고수발전시켜나갈 굳은 결심을 다진다.(시고꾸조선초중급학교 교무주임 김태성)

유아교실을 더 잘 꾸리고 운영하여 어린이들에게 민족적정서를 키워주며 우리 학교 학생수를 늘일데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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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지바현의 유아교실 《향아》가 지난 5월 15일, 제6기생 16명을 새로 맞이하고 금년도 사업을 시작한 자랑을 안고 오늘 이 대회에 참가하였다.

《향아》교실은 한달에 1번 제3주 토요일 오전중에 지바조선초중급학교의 교실에서 운영하고있으며 2명의 전임일군과 교실장을 맡는 나를 포함한 11명의 비전임과 어머니들이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있다.

교실은 4살, 5살아이들을 함께 보고있으며 다양한 놀이와 함께 우리 말, 우리 노래, 풍습들을 자연스럽게 도입한 과정안으로 운영하고있다.

우리 《향아》교실에서 진행되는 모든 교수내용과 자료, 직관물들은 우리 어머니들자신이 독자적으로 고안하고 만들어내고있으며 아이들에게 배워주고 함께 놀아주는 선생들도 모두 우리 어머니들이다.

여러 곤난을 이겨내며 교실을 개설하게 된것은 우리 학교 학생수가 감소되고동포사회가 축소되여가는 현실에 대한 위기감때문이였다.

그 첫 계기는 자녀교양문제를 중요과업으로 일관하게 틀어쥐고온 녀성동맹본부에서 이 문제에서 돌파구를 열려고 새 세대들을 대담하게 믿고 어린이페스타를 기획하고 성공시킨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중심적역할을 논 어머니들이 자기 세대들의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소박한 《연구회》를 만들어 활동을 꾸준히 벌려나가는 과정에 지바현에서도 정기적인 유아교육의 마당과 새 세대 어머니들의 배움터, 요람으로 되는 공간을 마련하자고 《향아》교실을 내오게 되였다.

첫시기는 무엇부터 손대면 좋을지 몰라 간또지방의 우리 유치원을 찾아가거나 일본 각지의 친구어머니들로부터 자료를 얻으면서 배워나갔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년간과정안을 풍부화해나갔으며 《하나를 만들어도 더 맵시있게, 멋지게 만들자.》는 생각으로 아이들을 위해 어려움도 웃음으로 이겨내면서 맡겨진 일을 책임적으로 해왔다. 그리하여 어린 꼬마들은 지바학교 학예회에도 해마다 출연하여 유아교실에서 배운 우리 말, 우리 노래들을 예쁘게 피로하여 대절찬을 받고있다.

이렇게 5년간 꾸준하게 헌신적으로 운영해온 결과 오늘 《향아》교실은 지바현 학생인입사업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거점으로, 폭넓은 우리 아이들과 부모들의 교육발신지로 되였다.

유아교실에 다닌 아이들이 지바초중에 처음으로 입학하게 된것은 2006학년도이다. 그해는 신입생 12명중 12명전원, 2007학년도는 13명중 10명, 2008학년도는 14명중 13명, 2009학년도는 9명중 8명, 2010학년도는 12명중 11명, 합계 54명의 신입생들이 우리 《향아》교실에서 배운 아이들이니 유아교실의 정당성과 생활력은 얼마나 큰가를 이 사실이 여실히 보여주고있다.

우리가 유아교실운영에서 얻은 귀중한 교훈은 무엇보다도 유아교실은 동포아이들에게 민족적정서를 키워줄뿐아니라 한창 아이를 키우는 새 세대 어머니들, 나아가서 아버지들도 민족적으로 단합할수 있는 귀중한 공간이며 학생인입사업으로 이어주는 중요한 마당, 공간이라는것이다.

또한 이 마당에 많은 어린이들을 망라하자면 역시 총련의 기층조직의 역할이 매우 크다는것이다.

나는 《향아》교실에서 우리 아이들을 잘 키워나가는 일에 더욱 헌신할것이며 우리의 생명선이고 애국1세들의 고귀한 재산인 민족교육과 동포동네를 지키고 발전시켜나가는데서 제몫을 다해나갈것을 굳게 결의다진다.(지바유아교실 《향아》교실장 지등숙)

학교를 사랑하는 운동을 적극 벌려 학교운영의 자립적토대를 튼튼히 구축할데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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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고에서 해방된 민족의 기쁨을 안고 애족애국의 길에 나선 아버지는 4.24교육투쟁때에 옥중생활을 했으며 총련결성후에는 히메지, 아이오이, 히가시고베에서 교장사업을 맡아하였다.

페결핵을 앓은 아버지는 1966년에 공기가 좋은 혹가이도로 거처를 옮겨 치료를 받으면서 지부부위원장, 도상공회 회장을 맡아 민족교육사업에 이바지하고 히가시고베조선초중급학교가 한신아와지대진재로 큰 피해를 입었을 때는 지원금을 보내기도 하였다.

어려서부터 이런 아버지를 보면서 자란 나는 조대 사범교육학부를 졸업한 후 도꾜에서 1년, 혹가이도에서 10여년동안 교편을 잡았으며 그후 기업을 하면서 학교사업을 도왔다.

8년전인 2002년 6월, 아버지의 뜻을 이어 혹가이도조선초중고급학교 교육회 회장사업을 맡아나선 며칠후 아버지는 75살을 일기로 우리의 곁을 영영 떠나고말았다.

커다란 슬픔속에서도 어머니는 아버지의 뜻이라면서 조의금전액을 혹가이도초중고와 손자들이 다니는 도꾜조선제3초급학교에 희사하였으며 가족들도 뻐스와 함께 별도로 교재교구를 사보냈다.

부모님의 뜻대로 나는 후대들을 위해 일을 더 잘해야 한다는 결심을 안고 교육회사업에 달라붙었으나 어려움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버블경제》가 파탄된 후 학교운영에 보태온 유기업과 음식업점포들의 자동판매기에서 얻은 수입금이 4분의 1로 떨어졌고 혹가이도의 교육보조금과 삿보로시의 조성금마저도 감액되였다.

나는 난관타개의 고리가 새 세대들의 잠재력을 불러일으키는데 있다고 보고 총련본부의 지도방조밑에 새 세대 학부모들을 대담하게 리사로 등용하였으며 부회장을 신망이 높은 상공인들로 꾸렸다.

그리고 학교운영을 일부 찬조자들에게만 의거해온 낡은 틀을 마스기 위해 학교운영의 모범을 창조한 나고야조선초급학교 교육회 회장을 초청하여 경험을 듣고 《학교사랑1구구운동》을 벌린 결과 이 운동에 우리 동포 426명, 일본사람 42명, 래왕자 10명, 6개의 단체를 포함하여 총 501명이 협력해나서게 되였다.

또한 총련과 민단, 일본사람이 경영하는 142개 유기업점포와의 사업을 적극 벌린 결과 해마다 수입금을 2,000만엔수준에서 보장하게 되였다.

우리 학교에서는 2년에 한번 광범한 일본사람들을 초청하여 《안녕페스타》를 진행하고있는데 지난해에는 2,800여명의 사람들로 흥성거렸으며 삿보로시장장이 처음으로 찾아왔다.

나는 매달 15일에 교원들의 인건비를 해결하기 위해 5~6시간 전차를 타고 2박, 3박하면서 동포상공인을 만나 꾸준히 사업하여 100만엔이상의 고정찬조자를 30구구 꾸렸다.

이리하여 지난 8년동안 년간 1억 3,000만엔의 예산을 한푼의 빚도 없이 념출하고 교원들의 인건비를 꼭꼭 보장하고있다.

민족교육을 강화하는 해인 올해에 청상회는 지난 1월, 3일간에 걸쳐 《친형제 윈터페스티벌》을 조직할것을 발기하고 여기에 우리 학교 학생들과 함께 초급부입학생대상, 일교재학 동포자녀들을 수많이 참가시켜 초급부 신입생대상 2명, 초4 편입대상 1명의 원서를 받아내였다.

우리가 래학년도의 신입생과 편입생 130명의 명단을 갖추고 입학식 당일부터 적극 사업한 결과 벌써 3명이 우리 학교에 편입할 의사를 표시하고있다.

또한 올해 4월부터 한달에 3번 운영되는 아동교실에 6명, 유아교실에 22명의 자녀들을 망라하여 준정규교육사업을 실시하고있으며 이를 토대로 하여 앞으로 유치반을 개설할 전망을 세워나가고있다.

우리는 경제적리유로 일본학교에 가는 학생이 나오지 않도록 올해부터 어려운 동포가정을 위한 《교육지원기금》제도도 새로 내왔다.

나는 회장사업을 통하여 민족교육을 기어이 고수발전시키겠다는 열성이 뜨거울 때 동포들은 호응해준다는것을 체험을 통하여 틀어잡게 되였다.(혹가이도조선초중고급학교 교육회 회장 리달수)

총련지부상임위원회를 튼튼히 꾸리고 그 역할을 높여 애족애국력량을 확대강화할데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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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전, 오사까부하에서도 가장 동포인구가 많은 총련 이꾸노서지부 위원장의 중책을 맡게 된 나는 김일성주석님의 유훈과 김정일장군님의 지부중시사상을 언제나 가슴깊이 새기고 이곳 지부의 애족애국전통을 새 세기에도 계속 빛내여나갈 일념으로 사업하여왔다.

애족애국사업의 기본단위인 총련지부가 흥해야 학교사업도 잘되고 동포들의 행복도 담보된다는것을 신조로 삼고 나는 배치된 후 두달동안에 지역에서 영향력이 있는 131명의 새 세대를 비롯한 동포들과 만나 그들의 의견을 귀담아듣는 속에서 분회건설, 학교운영과 재정문제, 회관로후화 등 지부가 안고있는 많은 과제들을 해결할 결의를 다졌다.

우리는 회관개축운동을 선차적인 사업으로 틀어쥐고 수많은 동포들로부터 단기간에 1,100만엔의 귀한 돈을 모아 지부회관을 동포들이 늘쌍 즐겨 모일수 있는 다목적활동공간으로 개축하였다.

이에 토대하여 우리는 지부상임위원회를 튼튼히 꾸려 지역의 지도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힘을 돌렸다.

나는 지부상임위원회를 활동경력이 오래고 경험이 있는 상임들과 혈기왕성한 새 세대 열성자 12명으로 보강하였으며 비전임학습반을 한달 1번 진행하는것을 제도화하였다.

우리는 운동상문제들은 물론 학교문제와 재정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털어놓고 진지하게 토론하고 상임들에 대한 분공, 총화, 재포치사업을 달마다 꾸준히 진행함으로써 그들의 자각과 역할, 사업에 대한 의욕을 부단히 높여나갔다.

한편 우리는 모든 분회를 빈자리없이 꾸리고 활성화할 목표를 내걸고 본부와 지부, 비전임일군들이 한덩어리가 되여 밤낮 가림없이 맹렬한 활동을 벌렸다.

그 결과 이 기간 재건대상이였던 모모다니동서분회는 40대 분회위원 4명으로, 나까가와서분회는 분회위원 6명으로 분회위원회를 새로 꾸렸으며 쯔루하시분회도 새 세대 학부모 2명을 분회위원으로 받아들여 위원회적인 활동으로 새 출발을 하게 되였다.

학교운영을 위하여 100만엔을 희사한 조선시장분회를 비롯하여 분회단위에 44명의 선전원으로 210명을 대상하는 5호담당선전원체계도 세움으로써 활동도수를 한층 높이게 되였다.

그리하여 9개 모든 분회를 생기발랄하게 움직이는 분회로 활성화한 우리는 학생인입목표를 113%, 회비납부자대렬을 1.8배로 늘인것을 비롯하여 지부가 내건 모든 운동목표를 100%이상 달성하였다.

뿐만아니라 오사까조선제4초급학교창립 60돐행사를 크게 성공시켜 1,450만엔을 학교에 희사한것을 비롯하여 납량모임, 바자, 채리티골프모임과 채리티마장 등에 새 세대를 비롯한 수많은 동포들을 망라하여 얻은 리득금으로 학교운영에 큰 도움을 주고있으며 교원들의 인건비도 100% 해결하고있다.

이 기간 우리는 지부추진위원회를 열성동포들로 폭넓게 꾸리고 《동포되찾기운동》을 적극 벌려나감으로써 문예체육소조를 비롯한 각종 《그릇》을 29개로 확대하고 여기에 450명의 동포들을 망라하고있으며 500호를 넘는 동포들과의 일상적인 련계망을 펼치고있다.

나는 애족애국운동의 종합적거점이며 집행단위인 총련지부사업이 정상화, 활성화의 궤도에 확고히 올라서야 재일조선인운동의 새 전성기를 열어나갈수 있다는것을 깊이 명심하여 지부의 전반적토대를 더욱 튼튼히 다져나가겠다.(총련오사까 이꾸노서지부 위원장 임종효)

《동포되찾기운동》을 각계각층 동포들이 주인이 된 범동포운동으로 확대강화할데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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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련 니시고베지부는 효고현하에서도 가장 많은 7,000명의 동포들이 거주하는 거점지부이며 4.24교육투쟁의 정신과 애족애국전통이 어리여있는 자랑스러운 지부이다.

1995년의 한신아와지대진재로 많은 동포들이 딴 지역에로 이사가고 1만명을 넘었던 동포수가 크게 감소되였을뿐아니라 수많은 1세고령동포들이 홀로 살게 됨으로써 동포동네의 분포망과 생활양식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되였다.

6년전에 교육사업을 하다가 이곳 지부위원장의 중책을 맡은 나는 선대에 대한 의리와 후대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여 지부의 면모를 일신시킬 각오로 사업에 달라붙었다.

특히 나는 21전대회에서 중요하게 제기된 《동포되찾기운동》을 김정일장군님의 강령적말씀을 관철하기 위한 기본구멍수로 틀어쥐고 운동의 추진모체인 지부추진위원회를 51명의 일군들과 열성동포들로 꾸리였으며 추진위원회안에 1개 위원회와 3개 부회를 내오고 그 역할을 부단히 높여나갔다.

문화교실운영위원회는 지난 시기 지부위원장을 한 고문을 책임자로 하여 각 단체담당자들과 소조책임자들 17명으로 구성하고 문예체육소조를 체계적으로 활성화해나감으로써 총화기간 5개로부터 20개로 확대한 각종 소조에 민단, 미조직동포들을 포함한 250여명을 정기적으로 망라하여 지부회관을 매일 흥성거리게 하고있다.

이와 함께 행사기획추진부회를 청상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꾸리고 그들을 지부가 조직하는 문화체육행사의 기획자, 조직자로 내세움으로써 해마다 800여명을 망라한 8.15야회를 조직하고있다.

권리복지부회는 총련지부와 상공회일군, NPO법인 《코리안생활쎈터-〈이어고베〉》리사와 복지전문가들로 꾸리고 동포생활상담사업과 데이써비스활동을 적극 안받침하고있다.

특히 설립한지 4년이 되는 데이써비스 《이어고베》는 작년 9월부터 그 수용력을 초기의 15명으로부터 25명으로 확대함으로써 사상과 정견, 단체소속을 불문하고 고령자를 모시는 동포가정을 보다 많이 도와줄수 있는 상부상조의 마당으로, 長田지역에서도 음식이 맛있고 써비스의 질이 높은 이름난 개호보험시설로서 커다란 지지를 받고있다.

나는 지난 4년간 지부위원장을 하면서 《이어고베》의 리사장으로, 관리자로, 개호담당자로, 운전수로, 사무원으로 온갖 분공을 스스로 맡아 투신하고 녀성동맹위원장을 비롯한 우리 일군들이 밤낮 가리지 않고 두몫, 세몫 희생적으로 일한 결과 《이어고베》의 리용자수는 실수 50명을 돌파하고 작년도결산을 500만엔의 흑자를 내여 상공인들에게서 빌린 융자금 2,200만엔을 지난 5월초에 기한보다 1년 앞당겨 몽땅 반환하게 되였다.

우리는 이렇게 2대중심기둥을 더욱 두터이 해온 동시에 《동포되찾기운동》의 기본형태인 동포들을 찾아내고 각종 《그릇》, 사업가지에 망라하기 위한 전호방문련계사업을 따라세움으로써 10개 분회중 9개를 움직이게 하였으며 조청지부도 5년만에 전임일군을 꾸린것을 계기로 동맹원수를 3년전의 1.7배인 100명대로 확대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총화기간 조대, 조고졸업생을 비롯한 각계각층 동포들을 찾아내고 그들을 우리 학교와 각종 민족적인 《그릇》과 사업가지에 망라하여 동포련계망을 3년전의 505호로부터 그 1.6배가 되는 810호로 확대하였으며 학생인입지표도 100% 달성하는 일찌기 없었던 전진을 이룩하였다.

나는 본대회가 제시한대로 《동포되찾기운동》을 각계각층 동포들이 주인이 된 범동포운동으로 끊임없이 확대강화함으로써 장군님의 강령적말씀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에서 결정적전진을 이룩할것이다.(총련효고 니시고베지부 위원장 김춘권)

민족교육사업을 중심에 놓고 지부사업을 활발히 벌려 흥하는 지역동포사회를 꾸려나갈데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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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장군님께서는 존속의 위기에 처한 학교를 소생시키고 학교사업발전전망을 열어놓은 니시도꾜조선제2초급학교 리정애교장의 사업을 높이 평가하시여 그에게 로력영웅칭호를 수여하여주시는 크나큰 사랑과 배려를 돌려주시였다.

하해같은 은덕을 새기면새길수록 리정애영웅이 사업하는 학교소관지부의 위원장된 긍지와 자랑을 금할수 없다.

내외반동들의 책동과 소자화, 지속되는 경제불황 등으로 우리 지부의 니시도꾜제2학교는 1998년에 유치반을 휴원하고 2005년에 중급부를 휴교하자 일부 동포들속에서는 페교를 해도 할수 없지 않는가 하는 말까지 나왔다.

민족교육의 존속에 역풍이 불고 현실추종과 조건타발이 만연하는 속에서 이에 당당히 맞서 어려운 사태를 역전시키기 위하여 불퇴전의 각오를 안고 투쟁의 맨 앞장에 선것이 바로 리정애영웅과 우리 학교 교직원들이였다.

리정애영웅은 장군님에 대한 티없이 맑은 충성심과 깨끗한 량심, 선대들에 대한 의리와 후대들에 대한 책임을 안고 교직원들과 한덩어리가 되여 동포들이 바라고 좋아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모두 해냄으로써 니시도꾜제2학교를 동포들이 사랑하고 지지하며 흥성거리는 학교로 만들었다.

우리 지부 선대위원장도, 학구관하 총련가나가와 쥬호꾸지부위원장도, 나자신도 교직원들과 보조를 맞추어 학교를 지키기 위한 사업에 가장 큰 힘을 돌려왔다.

우리는 니시도꾜제2학교가 다른 지역과 달리 가나가와 쥬호꾸지부와 마찌다지부로 학구가 구성되고있는 특수성에 맞게 학교민족교육대책위원회를 강화하는데 큰 힘을 넣었으며 두 지부동포들의 합동행사를 학교에서 정기적으로 진행하도록 함으로써 모든 동포들을 학교에 큰 관심을 돌리며 학교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사업에로 힘있게 불러일으켰다.

나 역시 이전 지부위원장의 모범을 따라 리정애교장의 제기를 받으면 무조건 풀도록 하였다.

2008학년도에는 하교시 주 5번, 등교시 주 3번 뻐스운전을 맡았고 2009학년도에는 학생수가 더 증가되여 먼거리에서 다니는 학생이 불어나 뻐스운전시간이 2시간이상 걸리였으나 하교시 주 3번, 등교시 주 2번 맡아 수행하였다.

지부사업을 하고 다음날 아침에는 다시 뻐스운전을 보장하기 위한 나날이 계속되니 어느새 지부사무소에 숙박하는 것은 례사로운 일로 정착되였다.

나는 교장을 비롯한 교직원들의 정열에서 더 큰 힘과 용기를 얻었으며 이런 교직원들과 함께 일한다면 학교사업과 함께 지부사업을 반드시 전환할수 있다는 확신과 신심을 가질수 있었다.

지난 2월 27일 니시도꾜제2학구관하 일군들과 동포학부모들, 교직원들과 학생, 졸업생들 180여명의 참가밑에 가진 《리정애교장의 공화국로력영웅칭호수여와 〈애족애국학교〉칭호수여를 축하하는 모임》은 지금도 잊을수 없다.

이날 어느 1세고문은 학교연역과 더불어 30대라는 젊은 나이에 돌아간 리정애영웅의 아버지와 함께 조련시기 활동한 추억을 피력하였다.

아버지회 회장은 흥분된 어조로 《더 좋은 학교를 꾸리기 위하여 학교를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나가겠다.》고 결의하고 쥬호꾸지역상공회 회장은 새 교사를 아담하게 세워 성대한 축하모임을 하자고 호소하였다.

학교사업이 잘되고 동포사회가 흥성거리니 분회재건사업에 새 세대들이 나서 게 되고 그렇게도 어렵다던 2개의 분회재건이 10년만에 실현되였으며 조청반도 2개 새로 일떠섰다.

특히 니시도꾜제2초급은 2011학년도 학생인입목표를 110% 달성하여 본대회를 긍지높이 맞이하였다.

우리는 2012년을 새 교사건설의 빛나는 성과로 맞이할것이다.(총련니시도꾜 마찌다지부 위원장 리진화)

총련분회를 광범한 동포들이 단합하고 화목한 매력있는 동포동네로 꾸릴데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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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분회관하에는 166호, 500여명의 동포들이 살고있다. 우리 학교가 가까우므로 나도 10년전에 이곳으로 이사해왔다.

분회 고문의 말에 의하면 1960~70년대에는 분회에서 행사를 할 때면 100명, 200명이 모여 흥성거렸는데 20여년간 총련분회가 제구실을 못한 탓으로 쓸쓸한 지역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러나 녀성동맹분회만은 이악하게 활동하여 동포사회를 지켜왔다.

지난 기간 총련지부일군들도 몇번이나 총련분회재건사업을 시도하고 달라붙었으나 좀처럼 진척이 안되였다고 한다.

나로 말하면 도꾜와 효고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부득이한 사정으로 퇴직한 후 20여년간 지부사업은커녕 분회사업에도 한번도 나가지 못했었다.

이렇게 조국과 조직을 멀리하고 살다보니 전임일군당시 가졌던 정신적지주도 희미해지고있었다.

때마침 총련에서 《제2차 총련지부일군대회》를 지향하여 《효고3개월집중전》이 한창 벌어지고있었던 지난해 5월 지부전임일군과 내가 따르고 존경하는 비전임지부부위원장이 나를 찾아와 《모두가 동무를 추천하는데 분회장을 꼭 맡아달라.》고 당부하는것이였다.

이 제의를 받고 뜬 눈으로 며칠간 밤도 새웠는데 30년전에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자꾸만 났다.

아버지는 비전임으로 아마가사끼조선초중급학교 교육회 부회장과 아마가사끼동지부 出屋敷분회장으로 오래동안 활동하면서 조국과 민족, 조직과 동포들을 위하여 한생을 깨끗이 바쳤다.

나는 아버지의 그 높은 뜻을 나이 50이 되여서도 여태껏 이어가지 못하고있는 자책감으로 가슴이 아팠으며 교원시기의 제자들의 얼굴도 떠올라 이제 나의 책임을 다할 때가 온것이 아닐가 하고 자문자답하였다.

생각한 끝에 나는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가 조직을 외면하여 살아온 20년간의 불효에 대해 용서를 빌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떳떳하게, 보람있게 인생을 살아갈 결심을 먹었다.

6월 6일에 열린 《분회유지들의 모임》에서 내가 분회장을 맡겠다고 나서자 어느새 그 마당이 《분회재건준비위원회》로 바뀌여지고 그 자리에서 당장 2명의 동포가 부분회장을 맡아서 분회장을 곁에서 돕겠다고 말해주었다.

그들과 여러차례 협의를 한 결과 7월 4일, 마침내 총련본부위원장을 비롯한 지부와 분회동포들 50여명이 모여 23년만에 총련 욕틀분회재건총회를 가졌다.

이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누구보다도 기뻐한것은 우리 녀성동맹분회장이였다. 총련분회의 재건은 죽었다는 남편이 23년만에 살아서 돌아온것과 같은것이였으니 그 심정이야 오죽하랴.

오늘 우리 분회에서는 한달 1번의 분회위원회를 빠짐없이 진행하고 지부군중행사인 8.15전야제동원사업과 광고조직사업목표를 넘쳐 달성하였으며 분회대항골프대회와 소프트뽈모임에는 가장 많은 동포들이 참가하여 각각 우승하였다.

지난해는 분회위원들이 가가호호 방문사업을 벌려 새로 회비와 《조선신보》, 잡지《이어》독자를 확대하였으며 년말에는 60여명 동포들로 송년회를 가지였다.

9명의 우리 분회위원들은 분회사업을 열성껏 할뿐만아니라 가족들도 모두 지부와 분회, 학교사업에 내보내고있다.

미더운 분회위원들이 합심하고 또 든든한 녀성동맹분회와 손잡고 사업을 벌리니 무슨 일이든 다 잘되는것이 오늘 우리 분회의 모습이다.

나는 우리 분회를 한신아마가사끼지역은 물론 효고와 나아가서 전국에서 이름떨치는 전통분회로 만들어나갈것을 굳게 결의한다.(총련효고 아마가사끼서지부 미즈도분회 분회장 강룡수)

총련시즈오까조직의 면모를 일신하고 새 전성기에로의 도약의 토대를 튼튼히 꾸릴데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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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까에서 나서자라고 40여년간 교원과 기본조직일군으로 일해온 나는 21전대회를 계기로 시즈오까현본부위원장의 중책을 맡게 되였다.

시즈오까는 너무도 생소하고 단 한명도 아는 동포가 없는 지역인데다가 환갑을 넘은 나이에 단신부임으로 사업해야 했으니 불안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사실 취임해보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제 조직을 재건복구하기는 어렵다, 때는 늦었다.》고 하면서 《위원장도 3개월을 못견딜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실태를 두고 나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고 단단히 각오를 다지고 누구보다도 땀을 많이 흘릴것을 속다짐하였다.

나는 전임일군들속에서 2007년을 《신뢰회복, 거점지부건설의 해》, 2008년을 《지부, 분회강화, 문화체육행사조직의 해》, 2009년을 《교육사업중심, 본부회관이전사업의 해》, 2010년을 《조직의 체모를 완비하는 해》, 《민족교육을 강화하는 해》로 할데 대한 목표를 세워 정책일치, 년도별사업계획에 대한 일치를 보고 우선 지부조직을 재건하여 지부상임위원들을 튼튼히 꾸리는 사업에 달라붙었다.

도부지부는 비전임위원장을 중심으로 상임위원회를 정상화하고 지부의 면모를 갖추고있었으나 본부와 학교가 있는 거점지부인 쥬브지부는 몇해동안 지부의 기능과 역할을 놀지 못하고있었다.

나는 쥬부지부의 재건활성화를 위하여 솔선해서 지부위원장을 맡고 과거 전임일군을 하거나 역직을 맡아하던 20여명의 동포들과 매일 사업하였다.

약 3개월을 하루같이 끈질기게 사업한 결과 2007년 11월 18일에 총련 쥬부지부대회를 가지고 11명의 상임을 꾸려 지부를 재건하였다. 이후 쥬부지부는 오늘까지 25차에 걸쳐 매달 첫주 일요일에 상임위원회를 정상운영하고있다.

이와 함께 지난 시기 전통있는 세이부지부의 열성동포들과의 거듭되는 사업을 2년간 꾸준히 벌린 결과 오는 5월 28일에 드디여 《세이부지부재건준비위원회》를 가지고 지부대회를 가질 확고한 전망을 열어놓았다.

우리는 새로 꾸려진 비전임열성자들과 함께 동포들속에 깊이 들어갔다.

《동포되찾기100일간운동》기간만 해도 전임일군들과 비전임열성자들 70명이 발동되여 752호, 실수 526호를 방문담화하였으며 우리 학교졸업생 191명의 새 세대동포들과 련계를 가지게 되였다.

나는 동포사회를 늘 흥성거리게 하는데 큰 관심을 돌려 년초에 신춘강연회를 출발로 년간 11번의 행사를 3년간 한번도 중단없이 꾸준히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연수 약 1,600명의 동포들이 년간행사에 참가하였으며 특히 분회대항소프트뽈모임을 통하여 유명무실하였던 다까마쯔분회, 쥬오분회 재건총회를 가져 분회활동을 활성화하였다.

조청본부도 작년 6월에 녀성조청원을 중심으로 8명의 상임위원들로 꾸리고 새 출발모임을 가졌으며 올해 4월에는 조대졸업생을 조청전임으로 받아들여 조청지부를 하나씩 건설해나가고있다.

청상회 또한 4번에 걸치는 재건준비위원회를 거쳐 오는 7월 11일에 6년만에 총회를 성대히 가지게 되였다.

이처럼 각급 조직이 재건활성화됨으로써 본부는 총련회비납부자와 찬조자대렬을 59호, 《조선신보》와 잡지《이어》를 35부 확대하였으며 매해 조선신보사에 출판물대금을 100% 상납하는 귀중한 전진을 이룩하였다.

우리는 총련시즈오까조직의 면모를 하나하나 일신시키고 새 전성기에로의 도약의 토대를 초보적이나마 갖추어 총련 22전대회를 뜻깊게 맞이할수 있었다.

총화기간 사업을 통하여 나는 기관책임일군인 나자신이 《하면 된다!》는 드놀지 않는 신념을 가지고 작전계획한것은 절대 흔들리지 말고 끝장낼 때까지 반복 도전해나가야 알찬 사업실적을 올릴수 있다는것을 실천적으로 틀어잡게 되였다.(총련 시즈오까현본부 위원장)

조청지부와 반조직을 튼튼히 꾸리고 광범한 동포청년들과의 사업을 참신하고 다양하게 벌려나갈데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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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선대학교를 졸업하여 푸른 꿈을 안고 전통깊은 가나가와 조직에 배치되여 조청전임일군으로 사업해온 지난 10년동안은 참으로 값있고 보람찬 기간이였다.

3년전 조청본부위원장을 맡은 첫시기만 하여도 전임지부가 이전에 비해 많이 줄어들고 비전임열성자대렬을 잘 꾸리지 못하고있었으며 반조직은 불과 25%밖에 가동시키지 못하고있었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그대로 두고서는 5년, 10년후의 가나가와동포사회도 존속시킬수 없고 그렇게 되면 선대들이 물려준 전통과 업적을 우리 세대에 와서 허물어버리는것으로 된다고 생각하고 비전임열성자대렬을 튼튼히 다지고 기층조직을 재건활성화하여 관하 4,000명 동포청년들의 과반수를 조청의 련계망에 망라해나갈 결심을 굳게 다지였다.

비전임열성자들을 튼튼히 다지고 그 대렬을 확대하는데서 조청본부가 단독으로 2009년 가을에 조직한 조청비전임일군대표단의 조국방문사업과 그를 지향한 교양사업은 참으로 교훈적이였다.

귀국운동의 첫 봉화를 올린 총련가나가와조직의 애족애국의 전통을 계승하고 귀국실현 50돐이 되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자고 년초부터 9개월간에 걸쳐 그 준비사업을 꾸준히 추진한 결과 난생처음으로 조국을 방문하는 조청원을 포함한 10명의 대표들이 조국의 청년들과의 뜻깊은 만남을 통하여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앞으로 조청사업을 보다 힘차게 벌려 동포사회를 지키며 총련의 대를 믿음직하게 계승해나갈 결심을 굳게 다지였다.

그리하여 조국에서 돌아온 비전임열성자들이 중심이 되여 작년 11월에 조청본부에 《새 세대 청년학습반》을 새로 내오고 비전임열성자들을 더 잘 키워나가는 체계를 보다 튼튼히 세우게 되였다.

이 성과를 공고히 다지면서 조청지부와 반조직을 재건활성화하는 사업을 벌리는 과정에 우리는 5명을 지부상임으로 내세워 지난해 6월에 요꼬스까지부재건모임을 가지였다.

조청본부는 반건설목표를 20개로 설정하고 반장, 반위원후보 60여명에 대한 개별담화사업을 전임일군과 비전임일군들이 분공맡아 진행하였으며 《100일운동》을 마무리하는 시기에 반대항예술경연모임을 27개의 모든 반에서 150명의 출연밑에 참신하게 조직하여 반건설사업을 더욱 추동하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우리는 《동포되찾기운동》의 요구에 맞게 우리 학교졸업생들을 장악하고 조청의 선전광보망을 확대강화하며 일교재학 동포학생들을 광범히 묶어세우기 위한 3가지 《프로젝트팀》을 비전임일군 40명으로 꾸리고 포착동포청년수를 확대해나갔다.

뿐만아니라 4개소에 청년학교를 설치운영하고 수많은 수강생들에게 민족의 넋을 심어주었으며 축구, 배구, 골프, 무용, 노래 등 16개의 문예체육소조를 활성화하고 동포남녀청년들의 《만남의 마당》도 린근 조청본부와의 공동주최로 5번 기획하고 여기에 157명을 망라하였다.

이처럼 총화기간 우리는 3년전에 4개였던 전임지부를 7개로 늘이고 비전임일군대렬을 1.7배가 되는 130명으로 확대하였으며 1개 지부와 본부관하 모든 반들중 81%가 되는 22개 반을 재건활성화하여 현하 동포청년의 46%인 1,850여명을 조청의 련계망에 망라하는 성과를 가지고 본대회를 자랑차게 맞이하였으며 이 성과를 공고히 다지고 더욱 분발할것이다.(조청 가나가와현본부 위원장 박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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