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탈선
2011년 06월 06일 10:45 문화(1)
《리미야, 아직 자지 않았느냐?》
방문을 열며 석준은 안으로 쑥 얼굴을 내밀었다. 책상에 마주앉아 록음테프를 듣던 리미가 뒤를 돌아본 순간 귀에서 이어폰이 떨어졌다. 그는 이어폰을 주으면서 마뜩지 않은 소리로 물었다.
《아니, 아버지가 내 방에 오시다니 어찌된 일인가요?》
석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대견한 눈매로 리미를 쳐다보면서 웃음을 머금고 말하였다.
《음…이제 곧 점방에 가야 하는데 어머니가 말하더구만. 저, 네가 영어로 하는 웅변대회의 예선을 통과해서 대학대표가 되였다 하기에 얼굴을 좀 보자고…》
리미가 의아해진 얼굴로 석준을 쳐다보았다.
《왜 그런 얼굴을 하니?》
《아버지가 그렇게나 기뻐하시는게 뜻밖의 일이여서. 여태까지 난 아버지는 일만 생각하시고 교육엔 관심이 없는줄 알았답니다.》
리미의 입가에는 흐뭇한 웃음이 흘렀다.
(그걸 이제야 알았단 말인가?…)
석준은 속으로 잦아든 야릇한 느낌을 뿌리치듯 헛기침을 하였다.
《넌 내가 교육에 관심이 없는줄 알았구만. 천만에, 내가 교육에 관심이 없다면 널 일본학교에 보내겠는가? 다 생각이 있어 한것이지. 하여간 잘했구나. 열심히 해서 우수한 성적을 타야지. 그래서 대학의 명예를 빛내야지.》
《대학의 명예?…》
리미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리였다.
석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미는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저었다가 락심한 얼굴로 손에 쥔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
석준은 왜 이러는가고 따져 묻고싶었으나 대번에 야릇한 느낌에 휩싸여 입이 열려지지 않았다. 얼마후에야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서 방에서 나와버렸다.
점방으로 가면서 그는 골똘히 생각하였다.
(내가 교육에 관심이 없다고?…)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것만은 받아들일수 없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삼촌의 슬하에서 자란 그는 생활이 가난해서 진학을 단념하였다. 불타는 향학심은 가슴속에서 재가 되여버렸다.
학교에 대한 생각을 할 때면 꼭 머리에 일본회사에서의 면접때 일이 떠올랐다.
면접담당자가 석준의 리력서를 보면서 오만상을 찌푸리며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조선학교를 졸업? 조선학교는 1조교로 인정 안되고있으니까 고급부를 졸업하여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자격은 없을텐데? 》
《예!?》
석준은 그때 처음으로 조선고급학교가 일본의 학교교육법상 고등학교로 인정 안되고있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아무 자격이 없는 조선학교가 보잘것없는 학교로 느껴졌고 이름 못할 수치감이 뼈속까지 스며드는것을 어쩔수 없어 대번에 몸과 마음이 옴츠러들었다.
돌아오는 길에서 만난 입심이 좋은 아주머니가 조선학교에 대한 불신감을 더 돋구어주었다.
《조선학교는 교육수준이 낮은것 같애. 사회에 나가면 일본사람을 상대로 일하는데 한자이름을 똑똑히 읽지 못하고 사람이름을 틀린다 하는데. 이건 기초의 기초인데도…》
그후 그는 면접담당자의 말이 증명된듯 모든 면접에 떨어졌다. 끝내 취직 못하고 토목공사의 견습공으로 일하게 되였다.
젊은 때는 고생을 겪을 때마다 일찍 세상을 떠난 부모를 원망했고 자기 처지를 저주하였었다. 어느덧 일본의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탓으로 갖은 고생을 겪는다는 생각이 머리에 박히였다.
리미가 학교에 들어갈 때는 자기와 같은 고생을 되풀이하여서는 안된다. 꼭 일본고등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무슨 자격을 받을수 있고 행복한 생활을 누릴수 있다고 확신하였었다.
그때 총련일군으로 사업하는 익준이 조국이요, 민족의 넋이요 해서 반대했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그에겐 일본의 고등교육만 받으면 조선학교에서 배우는것들도 다 저절로 해결된다는 확신이 있었다. 고등교육이 만사를 해결해준다는 확신이 있어 리미를 일본학교에 넣었다….
석준은 일손을 멈추며 어제 들은 리미의 말을 다시 상기하였다.
(내가 교육에 관심이 없다고? 일밖에 모른다?…)
애지중지 키운 딸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다니 생각만 하여도 온몸의 기운이 말라버린듯 피로가 한꺼번에 덮쳐들었다. 기분을 바꾸지 않고서는 밤일을 견디여낼것 같지 않아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부엌안에서 모자간의 말소리가 들리였다.
《리미야, 아버지는 언제나 이 시간에는 집에 안계시는데 오늘따라 어찌된 일이냐?》
《참, 어머니도… 어제밤 생각조차 못했던 아버지가 내 방에 불쑥 나타났던데. 오늘도 혹시나 아버지가 집에 계실지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뭐. 그래서 하- 숨이 가빠. 뻐스정거장에서 줄곧 달려왔는데 참.》
리미의 불만스러운 소리가 들리였다.
《그래. 그래서 달려왔구만.》
다 자란 딸을 어린아이처럼 달래는 안해의 소리를 듣고 석준은 일부러 끌신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 아버지 벌써 돌아오셨구만요.》
리미는 입가에 웃음을 띠우며 석준을 반기였다.
《음, 피곤해서 좀 쉴려고 들렸구나.》
석준은 리미의 얼굴을 스쳐보며 등받이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이고 스르르 눈을 감았다.
《아버지.》
곁에서 리미가 나지막한 소리로 불렀다.
《왜 그래?》
석준은 눈을 감은채 상을 찌프렸다.
《웅변대회인데…》
석준은 감은 눈을 살며시 떴다. 피곤이 실린 눈으로 리미를 바라보았다. 눈길이 마주치자 리미는 신이 나서 소리를 높였다.
《대학에서 소문이 자자해요. 이번 웅변대회에 조선대학교 학생도 참가한다고요.》
《뭐?》
석준은 두눈을 부릅뜨고 한참이나 리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선대학교?…그런 일이 있을수 있는가?》
석준의 눈에는 《그런 일은 있을수 없다.》 하고 부정하는 생각이 력력히 보인다.
《아니…아버지는 왜 그렇게나 부정하셔요?》
리미는 소리내여 웃었다. 석준은 자기의 심정을 알리 없는 딸을 그저 허전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기미를 챈 리미가 정색한 얼굴로 소리 질렀다.
《아버지, 일본학교에 죽 다닌 내가 조선대학교 학생에게 질수야 없지 않아요.》
석준은 뜻밖에 자기의 심정을 알아맞춘 말을 들어 기쁨과 쾌감으로 가슴이 들먹이였다.
《그럼, 그래야지. 일본학생한테 지는 일은 있어도 조선학생에게는 질수 없지.》
리미가 싱긋 웃었다.
(2)
석준은 딸이 믿어워 자랑스레 물었다.
《리미야, 자신있니?》
리미의 얼굴에는 어둑한 기운이 스스로 덮이였다.
《자신 같은건 없어요. 그렇지만… 이겨야지요.》
석준은 좋던 기분이 폭삭 주저앉았다.
《아니, 자신을 가져야지. 이런 때에 힘을 발휘할수 있도록 중급부시기부터 영어숙에 다녔지. 고등학교도 고르고 골라서 학교를 다녔고 대학도 그만하면 제법이지. 거기에다 방학마다 미국이요 카나다요 해서 공부하러 갔는데 조선대학교 학생에게 질리가 없지 않느냐.》
그의 소리는 열이 잔뜩 올랐다. 리미가 생긋 웃었다.
《…》
《드디여 리미가 증명해주는구만. 총련사람들의 말림을 무릅쓰고 일본학교에 보낸 정당성을 말이요… 생각만 해도 마음 흐뭇해지는구나. 그때엔 익준이한테 알려야지. 음, 누구보다도 먼저 익준이에게 알려야지.》
석준은 십여년전에 목에 피대를 세우고 외동딸에게 민족의 넋을 안겨주지 않고 무엇을 안겨주는가고 한 익준이와의 싸움을 상기하였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지만 그날부터 거의 발길을 끊듯 하다가 지방에 조동되여서 간다는 말도 없이 가버렸다. 이듬해 설날 동생한테서 처음으로 년하장이 왔다. 거기에 쓰인 주소와 전화번호에서 동생의 심정이 알리여 뜨거운것을 삼킨 일이 어제일처럼 생각되였다.
리미가 웅변대회에서 우승을 하면 누구보다도 먼저 익준에게 전화를 해서 알리리라. 뜻밖에 마련될지 모르는 익준과의 화해의 기회는 생각만 하여도 어깨가 으쓱해졌다.
다음날부터 석준은 리미의 방에 자꾸 들리였다. 방에 들어서서 딸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는것으로 만족을 느끼고 살짝 방을 나가군 하였다. 날이 갈수록 자기로서도 부질없는짓인줄 느끼면서도 《꼭 이겨야 한다.》는 마음을 딸에게 알리고싶어 그만둘수 없었다.
어느 초저녁에 석준은 볼일로 집으로 돌아온김에 리미의 방에 들리였다. 있다고만 생각한 리미는 방에 없었다. 그는 대번에 약이 올라 부엌일을 하던 안해를 단단히 따져들었다.
《왜 그런 눈치도 없어. 웅변대회가 끝날 때까지는 놀러 가는것도 동무를 만나는것도 살살 막아야지.》
그후 석준은 그때의 꾸짖음을 후회하였다. 그날부터 리미의 눈빛은 빛을 잃은듯 어두워지고 말았다. 행동에는 마지 못해 한다는태도를 뚜렷이 나타내였다. 석준이 방에 들어서면 하던 일을 그만두고 일부러 휴식한다 해서 침대에 눕거나 음악을 듣거나 하였다.
석준은 목구멍까지 나온 하고싶은 말을 간신히 참았다. 딸이 이젠 안하겠다고 하면 모든것이 끝장이다. 가다가 딸의 쏘아보는 눈길과 마주쳤을 때는 등골이 서늘해지는것을 어찌할수가 없었다.
(과연 이것이 정말 딸을 위한 일일가…)
그전의 확신은 온데간데 없고 몸도 마음도 지쳐 한숨만 쉬였다.
며칠이 지나 웅변대회의 날을 맞이하였다.
그날 석준은 리미를 따라가고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
《리미야, 함께 가지는 못하지만 결과는 꼭 알려주어야 한다. 결과가 나오면 곧 집에 전화를 걸어야 해. 알겠지?…》
리미는 고개를 끄떡할뿐이고 묵묵히 아침식사를 하였다. 석준은 곁에서 끈덕진 안해가 놀랄 정도로 몇번이고 같은 말을 거듭하였다. 그런데도 리미는 이날을 위하여 지운 새 슈트를 묵묵히 차려입고 웃음도 없이 집을 나섰다.
석준은 리미가 나간 후도 점방으로 가지 않았다. 등의자에 앉아서 신문을 펼쳐보기도 하고 잡지를 번져보기도 하는데 어느것 하나 눈에 들지 않았다. 온 정신이 대회장에서 우승한 리미를 머리에 그렸다가 지웠다가 하는데에 쏠리였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조선대학교란 글자에 우승의 메달이 달린것이 머리에 그려졌을 때는 당황하여 가슴이 두근거리였다.
그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였다.이제는 점방에 가야 할 시간이 되였는데도 일어서지 못하였다.
부엌간에서는 안해가 점방으로 가지 않는 남편 일이 마음에 걸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몇번이나 한숨을 지었다. 그는 집안일을 하다가도 무슨 소리가 조금만 나도 몸을 흠칫하며 일손을 멈추군 하였다.
석준은 벽시계만 자꾸 올려다보았다. 더디게 흐르는 시간에 답답하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머리속에는 이 생각 저 생각이 용솟음을 쳤다.
점심시간이 된 때부터 석준은 벽시계를 올려다본 다음은 《전화가 올 시간인데?》 하고 눈으로 묻듯이 전화기를 보았다. 그러다가 전화기가 초조한 마음을 비웃는듯이 보여 황급히 눈을 떼군 하였다. 안해가 조용히 곁에 왔다.
《전화가 걸려오지 않구만요.》
석준은 공연한 말을 하는 안해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안해는 좀 주춤거렸다가 말을 이었다.
《혹시 리미가 우승해서 하도 기뻐서 집에 전화를 거는것도 잊은거나 아닐가요?》
눈웃음을 짓는 얼굴에 그윽한 어두움이 흐른다. 석준은 한참만에 겨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럴수도 있지. 그 애가 속태우는 부모의 심정을 모를수 있지. 사람이 하도 기쁠 땐 그럴수도 있지만… 오늘처럼 속태우기는 처음이요. 아이참, 점방에 나가보겠어.》
석준은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안해의 말에 못이기는체 하며 집을 나가긴 했으나 어쩌면 리미가 알면서도 전화를 걸지 않는것 같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날 석준은 여느때보다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안해가 달리다싶이 나왔다. 그는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조용히 들어올것을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였다. 석준은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예감되여 느닷없이 긴장감을 느끼면서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등의자에 앉았다. 안해가 섭섭한 얼굴로 리미가 웅변대회에서 2위를 차지했다고 말했다.
《그래, 2위를 차지했구만. 2위라도 대단하지.》
석준은 안해의 측은한 눈길이 마음에 걸리여 그냥 맞장구를 쳤다. 안해가 힘없이 웃는다.
《그래요. 나도 그렇게 말했는데 우승이 조선대학교 학생이였다고 하지 않아요.》
《뭐!》
석준은 가슴이 덜컥하고 저도 모르게 치뜬 눈으로 안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해는 괴로운듯 의자에 풀썩 앉았다. 그는 한참이나 있다가 입을 떼였다.
《리미의 대학이 웅변대회에서 2위를 차지하는것도 처음이라 하는데도… 》
석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지 몰랐다.
(3)
(리미가 우승하지 못했다? 게다가 조선대학교 학생에게 졌다고?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석준은 그이상 생각하는것도 고통스러워 입을 꾹 다물었다. 얼마동안 서로의 숨소리가 들리듯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계속될듯한 침묵을 안해가 깨뜨렸다.
삽화 류순화
《그래서 리미도 전화를 걸려고 몇번이나 생각했지만 아버지의 심정을 생각하면 끝내 전화를 걸지 못했다고 하지 않아요. 리미는 더 마음이 상했을거니까 제발 리미를 탓하지 마세요…》
석준은 안해의 애원에 가까운 말이 비위에 거슬렸다.
《내가 탓하다니. 왜? 공부는 누굴 위해 하는가? 자길 위해 하는건데도…》
그는 분기와 함께 불쑥 튀여나온 자기 말에 더 기분이 상하였다. 그러나 딸이 오죽 마음 상했으면 안해가 이럴가 생각하니 그이상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다음날부터 석준은 리미의 방에 들지 않았다. 자기 마음을 수습하지 않고서는 리미와 얼굴을 맞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의식적으로 리미가 곤히 잠든 야밤에 돌아오거나 아침 일찍 집을 나가군 하였다. 안해에게서 리미가 식욕이 줄고 말도 잘 안한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 딸을 만나는것을 꺼렸다.
어느날 낮에 집앞에 선 석준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살며시 현관문을 열었다. 도적놈처럼 살금살금 서재에 들어가려는데 마침 부엌에서 나온 안해와 얼굴을 맞대였다. 안해는 쓴웃음을 지으며 뒤를 따라온다. 석준이 《쉬-》 하며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자 안해는 그만 웃음을 터치였다.
《아니, 리민 없어요.》
석준은 《그래.》 하고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안해는 자못 기분이 좋은듯 싱글싱글 웃었다.
《리미가 동무한테 갔어요. 겨우 좀 마음이 안착된것 같애요. 하여튼 얼굴을 맞대여도 말을 안하거든요. 얼마나 갑갑했던지. 애가 밖을 나가는것을 보니 이젠 괜찮은것 같애요.》
석준은 묵묵히 안해의 말을 들었다. 이 며칠동안 회화 없는 부자간의 사이에 들어 얼마나 애태웠으면 그렇게나 기쁘랴싶었다. 별안간 가슴속이 설렁거리더니 자기도 안해처럼 이런 일에서 당장 벗어나고싶은 충동을 얻었다.
(오늘 리미와 만나자.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자.)
그날 저녁 석준은 방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텔레비죤을 보고있었다. 방금전에 안해가 이웃집에 간 후는 온 신경을 귀에 기울이여 현관문의 잘각 소리를 기다렸다.
이윽고 현관에서 잘각 소리가 나자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좀 있다가 부엌문이 열리고 인기척이 났다. 갑자기 소리가 끊어진듯 조용하였다.
석준이 홱 뒤돌아보니 문곁에 리미가 서있었다.
《리미가 돌아왔구만.》
리미가 해죽이 웃는다.
《아니, 아버지 오래간만이구만요.》
《허허, 참.》
리미는 빙그레 웃으며 곁에 왔다.
《아버지, 웅변대회의 결과는 어머니한테서 들었겠지요?》
석준은 공연히 가슴이 울렁울렁하여 무엇이라고 말해야 좋을지 알수 없어 그저 측은한 눈길로 딸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말 없는 가운데 몇 순간이 흘렀다. 리미가 의자의 등쪽에 눈길을 돌리며 우스개말처럼 말했다.
《동무들이 방학간에 〈한국〉 아니, 아버지에겐 〈남조선〉이라 해야지요? 하여간 그곳에 함께 가자고 해요. 류행영화를 보고 화면으로 본 경치 좋은 곳에 가고싶다는건데…》
이 소리에 석준은 눈을 번쩍이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래, 〈남조선〉이지… 헌데 내가 〈한국〉을 인정 안하고 〈남조선〉이라고 한다는걸 안다 하면서 넌 무슨 말을 하려는가?)
《아버지.》
리미가 고적한 미소를 띄운 눈을 석준의 얼굴에 돌리였다.
《난 안가기로 했어요.》
《…》
(일찍 세상 떠난 우리 아버지는 《조선이 하나되면 고향에 가겠다.》고 했었단다. 그래서 나도 아직 안가는 〈남조선〉인지라 네가 간다 하여도 난처한 일인데… 안간다? 그건 또 왜?)
석준은 안도감보다 더하게 그 리유가 궁금하였다.
《그럼, 돈을 걱정해서 안가기로 했구만.》
리미가 펄쩍 놀라며 말대꾸하였다.
《아니예요. 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가기 싫어서 그래요.》
(뭣!?)
석준은 가슴이 바늘에 찔린것처럼 아파났다.
《아니. 외국에는 자꾸 가는데도 자기 나라에는 가기 싫다니…》
리미는 얼굴에 쓴웃음을 띄웠다.
《자기 나라? 력사도 지리도 모르고 말조차 모르는데 자기 나라?…》
《뭣!?》
석준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듯 눈앞이 아찔하였다.
《아마 동무들은 내가 조선사람이라는걸 모르고 다만 영화에서 본 풍경을 보러 〈남조선〉에 가자고 했을거예요… 그렇지만 난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말도 모르는 나라에 그것도 자기 나라에 간다는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해요.》
웃음이 사라진 얼굴에 서글픈 기색이 나타나보인다. 석준은 그만 펄쩍 뛰였다.
《뭐, 일본에서 태여나서 자랐는데 조선말을 몰라서 당연하지. 그리 심중히 생각할건 없어.》
리미는 눈웃음을 지으며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버지, 보통은 그것으로 통해요. 그러나 조선사람은 통하지 않아요.》
《뭣!?》
석준은 어쩐지 가슴이 섬찍하였다.
《아버지, 난 여태껏 조선사람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본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번 웅변대회에서 검정치마에 분홍색저고리를 산뜻하게 받쳐입은 조선대학교 학생이 당당하게 웅변을 하는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거기에다 조선대학교 학생이 언어는 민족을 특징짓는 징표의 하나다 해서 비록 일본땅에서 나서 자랐지만 자기 나라 말과 글을 꿋꿋이 지켜나가겠다고 호소했을 때는 온몸이 떨리는것을 어찌할수가 없었어요. 그럴만도 하지요? 자기 나라 말도 모르면서 국제화요, 뭐요 한 나이니까요… 그렇다고 이걸 어떻게 거기에 모인 일본대학생들과 같은 마음으로 들을수 있겠어요…》
석준은 벌벌 떨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리미야. 그 계속은 다음 기회에 듣겠다. 이젠 점방에 나가야겠구나.》
리미는 조용히 응하였다. 석준은 어쩐지 점잖게 된 딸의 언행에 위압감을 느끼며 집을 나섰다.
(계속)
(문예동 맹원 박순영)
( 조선신보 2011-06-06 10:4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