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통신대표단의 재일동포민족교육기관 답사기 ① / 정기열
2026년 05월 11일 09:48 민족교육21세기 연구원 원장이며 제4언론 발행인 겸 편집인인 정기열교수가 일본의 민족교육기관을 찾은 재미동포들의 답사기를 본사 편집국앞으로 보내왔다. 정교수가 보내온 글을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
들어가는 말
이 글은 반세기 넘게 나성에 거주하는 북미주민족운동원로 손세영 민족통신 대표를 단장으로 한 민족통신대표단(이하, 대표단)의 일본열도 3개 지역, 7개 “재일동포민족교육기관”에 대한 10박 11일(2월 28일-3월 10일)에 걸친 참관기(參觀記)이자 답사기(踏査記)다. 대표단답사기는 1945년 8.15 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재일조선인사회”와 해방 뒤에도 그들에게 끝없이 가해진 일제식민지시대 민족차별과 80년 그들을 끝없이 엄습했던 온갖 고난과 역경, 시련 속에서도 한치의 타협, 물러섬 없이 견결히 지켜온 “재일동포민족교육운동”에 대한 재미동포들의 집단학습경험을 담은 일종의 ‘집단체험기’다. 답사기는 1부를 시작으로 후기 포함 모두 6편으로 나뉘어 소개될 것이다.
I부
“재일조선인사회”와 “재일동포민족교육운동”에 대하여
“재일조선인사회”와 ‘재일동포민족교육운동’”
대표단의 재일동포민족교육기관답사 첫 구상은 작년 8월 민족통신 월례정세강좌 때 시작됐다. 정확히 반년 뒤 2월 28일 재미동포6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이 도쿄 하네다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도착 뒤 대표단은 다른 일정 일체 없이 공항온천호텔에서 태평양바다를 건너며 쌓인 여독을 먼저 뺀 뒤 저녁식사 때 가진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끝으로 모두 일찍 쉬었다. 그리곤 도착 바로 다음 날 3월 1일 이른 아침부터 대표단은 만 열흘에 걸친 재미동포들의 재일조선인사회와 재일동포민족교육운동에 대한 첫 집단학습의 첫발을 내딛었다. 대표단 답사기 집필을 책임진 저자에겐 조선대학을 중심으로 재일동포들과 함께하며 자연스레 그들과 한 식솔이 되어간 지난 15년 언젠가부터 심장 깊은 곳 어딘 가로부터 절로 터져 나온 표현이 하나 있다. 재일조선인사회와 민족교육운동에 대해 쓰고 논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절로 터져 나오는 “참으로 아름답고 위대한”이란 표현이다.
1945년 8월 해방 직후 식민지 종주국 일본땅에서 재일조선인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시작되어 80년 지난 오늘도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는 “전대미문의 인류사 초유의 위대한 민족교육운동”에 대해 쓰고 말할 때마다 버릇처럼 입에서 튀어나오는 수식어다. 재일조선인사회와 민족교육운동에 대해 그리 쓰고 말하고 주장하기 시작한 시점은 만 10년 전 2016년 가을이다. 정확히는 그해 11월 조대 창립 60주년 기념국제학술대회 때 발표한 논문에서 그리 처음 주장했다. 그때로부터 10년이 지난 오늘 나는 더욱 깊은 확신 속에서 그리 쓰고 말하고 주장한다. 당시 60주년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재일동포민족교육운동을 유네스코 세계인류문화유산에 등재할 것”을 제기하게 되면서 그 개념은 좀 더 명확하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재일조선인사회와 민족교육운동에 대한 그와 같은 깊은 확신과 깨달음은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깊어져갔다.
“고향이 남녘인 절대다수 재일동포들”은 해방 뒤 북녘을 자신의 “새로운 조국”으로 선택하다
과거 남녘노래가사에 “꽃보다 아름다운”이란 표현이 있다. 재일동포들과 한식솔이 되고 형제가 되며 동지가 됐던 지난 15년 끝없이 만나는 민족교육 받은 3세 4세 5세 6세 7세 조선학생들을 묘사하고 표현하는데 그보다 좋은 표현을 찾지 못했다. 몸은 비록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민족교육 받고 자라난 재일동포학생들이 “꽃보다 아름답기 그지없다”는 체험을 수도 없이 경험하며 갖게 된 확신이다. 조선대학교를 중심으로 동포들과 하나가 되어간 생활이 해를 거듭할수록 그와 같은 체험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재일조선인사회와 민족교육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답사기 1부에서 먼저 하는 이유다. 관련해서 소개하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세상에 그리 널리 소개되지 않은 이야기다. 민족교육을 80년 지켜오신 ‘재일조선인사회’를 ‘참으로 아름답고 위대하다’ 소개하게 된 대표적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이 아직 다는 모르는 그러나 참으로 감동적인 “위대한 재일조선인력사” 중 하나다. 1945년 8.15 해방 뒤 꿈에도 그리던 조국이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강제분단 된 뒤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위대한 재일조선인사회”의 어쩌면 제일 중요한 첫 역사이야기다.
일본내무성 자료에 의하면 “1944년 말 일본에 체류하던 우리민족은 193만명”이다. 조선대학교 산하 조선문제연구센터자료에 의하면 “강제연행”으로 끌려온 분들과 “밀항” 등 여러 경로를 거쳐 일본에 이미 와있던 동포수를 모두 합하면 해방 직후 우리민족은 대략 “200만에서 240만명”에 달했다. 그분들 중 “90%이상의 고향은 남녘”이었다. 즉 재일조선인 절대다수가 당시 “꿈에도 그리던 고향”은 주로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가 언젠가 조국이 해방되면 돌아가기를 학수고대하던 정녕 꿈에도 잊지 못한 남녘의 그리운 고향들이었다. 남녘이 고향인 절대다수 재일동포들은 그러나 조상의 뼈가 묻힌 남녘의 고향 대신 해방 3년 뒤 북녘을 자신의 새로운 “조국”으로 선택한다. 1948년 9월 9일 북녘에 건국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자신의 조국”으로 선택한 것이다. 왜? 무엇 때문에?
주지하듯 첫째 8.15 해방 직후 “9월 8일 인천항 통해 들어온 [미제]점령군”에 의해 남녘세상이 하루만에 아수라장으로 바뀐 직후 바로 다음 날 9월 9일 “미군정청”이 설치되며 제국주의지배가 일제에서 미제로 얼굴만 바뀐 채 본질에선 해방 전과 후 바뀐 것이 아무 것 없는 암흑 같은 세상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둘째 해방 뒤 변화는 커녕 남녘세상이 일제 대신 새로운 주인(미제) 섬기며 대표적인 악질적 친일반민족세력이 식민지대리권력으로 등장, 친미사대주의자들과 함께 반세기 일제지배시대 온갖 희생과 고난 무릅쓰며 나라의 독립과 해방 위해 투쟁을 멈추지 않은 진정한 애국자들과 반일투사, 지식인, 노동자, 농민들을 거꾸로 탄압하고 투옥하며 대량학살 일삼는 지옥 같은 세상으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남녘과 해외동포들이 “재일조선인사회와 민족교육운동”에 드리는 깊은 감사와 존경, 사랑
지난 15년 일본 각지에서 만난 숱한 동포들이 입버릇처럼 되뇌는 표현이 하나 있다. 늘 깊은 감동 속에서 듣는 “꿈에도 그리는 조국과 운명과 숨결을 함께하며”란 표현이다. 그 표현 속엔 북녘의 “사회주의조국”을 자신의 조국으로 선택한 이유만으로 80년 겪어야 했던 재일동포들의 온갖 고난, 시련과 함께 그러나 한편 그 누구도 감히 함부로 범접 못할 높디높은 존엄과 긍지, 기쁨, 굳은 의지와 신념이 깊이 묻어난다. 유치반부터 조선대학교 입학까지 12년 그리고 졸업까지 4년 모두 16년의 민족교육 받은 우리학교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이루 다 말로 표현키 어려운 깊은 감동과 함께 한편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감사와 존경을 재일조선인사회에게 삼가 끝없이 드리게된 이유다.
재일동포들의 고난에 가득 찬 하여 참으로 아름답고 위대한 기나긴 80년 민족교육운동사 여정에 재미동포학자로 뒤늦게 참가, 지난 15년 ’80년 위대한 재일조선인력사’에 대해 배우고 또 배우며 끝없이 배우는 이유다. 끝없는 배움과 깨달음 속에서 반복해 경험하며 우러나는 감사와 존경, 사랑의 마음이다. 그와 같은 체험과 경험은 그런데 본 답사기 저자에게만 국한된 것일까? 2016년 조선대학교 창립 60주년 때부터 코로나기간 빼고 7-8년 조선대학교를 중심으로 도쿄 소재 민족교육기관들을 꾸준히 참관하는 국제학생교류프로그램 통해 재일동포민족교육기관들을 꾸준히 방문하는 미국대학생들과 교수들은 무엇을 체험했고 어떤 감정과 희열을 경험했을까? 한편 올해 조직된 민족통신대표단은 어떠했을까? 미국대학생교수프로그램이 모두 도쿄에 국한된 경험이었던 반면 그들과 달리 이번 민족통신대표단은 조선대학교와 도쿄 외에 2개 지방(나가노.아이치현)에 소재한 유치반부터 초중고까지 모두 7개 민족교육기관들을 찾아갔던 재미동포들은 어떤 경험을 했을까? 저자와 다른 경험을 했을까? 아니면 그들도 같은 경험을 했을까?
민족교육기관을 찾는 이들은 우리민족.타민족 상관없이 기본 모두 같은 체험, 경험을 한다?
다르지 않았다. 기본 모두 같은 경험을 했다. 그리 소개하고 주장해 과하지 않다. 우리민족은 물론 타민족 또한 다르지 않았다. 차이가 있다 해도 기본 같았다. 민족교육기관들을 참관할 때마다 민족, 언어, 문화, 종교 등 여러 차이에도 참관자들은 기본 모두 같은 경험을 했다. 그 모든 과정을 거의 매년 가까이 곁에서 지켜보며 내린 결론이다. 그렇다. 예외가 없었다. 일정한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그러나 기본 모두 같은 경험을 한 것만은 틀림없다. 그렇다 15년 내리 반복된 경험에 기초한 결론이다. 올해 2026년 민족통신대표단 경우 또한 다르지 않았다. 조선대학교를 중심으로 15년 전국의 민족교육기관들과 재일동포 속에서 경험하고 또 경험한 표현키 어려운 그 어떤 깊은 감정들을 재미동포들 또한 경험했다. 깊이깊이 체험했다. 민족, 피부, 국가, 언어, 문화 등 여러 차이에도 재일동포민족교육기관을 찾는 사람들은 그가 어디에서 왔건 기본 누구나 모두 같은 경험을 한다 결론해 틀리지 않다. 과하지 않다. 그리 주장해 무리가 없다.
그러면 무엇이, 도대체 무엇이 이곳을 찾는 우리민족, 타민족 모두로 하여금 그와 같은 경험, 체험을 가능케 할까? 무엇이? 왜?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민족과 국가, 피부, 종교, 사상, 언어 등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경험과 체험을 갖게 할까? 혹 전국의 유치반부터 초중고급학교, 조선대학생들에 이르기까지 그들 모두의 해맑은 웃음이? 그들의 꽃보다 아름다운 눈동자가? 그들의 소박하고 순수한 우리말이? 그들의 진심이 담긴 예의 바른 인사가? 그들의 밝고 명랑한 웃음소리가? 등등 혹 그 모두가 하나의 답이 아닐까? 그들의 그 맑고 깨끗함이 아름다움이 해맑은 웃음이 순수함이 밝고 환함이 예의바름이 무엇보다 그들의 미래에 대한 소박한 꿈과 희망이 그들의 지극한 동포사랑과 조국사랑이 그 모든 것에 담긴 그들의 표현키 어려운 그 어떤 진실, 그 어떤 큰 진실이 세상곳곳에서 그들을 찾는 모두를 깊이깊이 감동시키는 그 무엇은 아닐까?
아니면 세상일반과 근본에서 많이 다른 그들의 세상을 보는 눈, 그들의 절절한 조국에 대한 그리움, 그들의 소박하고 깨끗한 꿈과 생각들, 그 모든 것을 여기 말로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 말하면 혹 그들의 “동포관”, “조직관”, “조국관”, “인민관”, “수령관” 등등 그 모든 것을 합한 그 무엇 때문은 아닐까? 그들의 세상과 많이 다른, 참으로 많이 다른 시각, 꿈, 눈, 생각, 학습, 사상 등등이 그들을 만나는 세상사람 모두로 하여금 표현키 어려운 그 어떤 체험과 경험, 배움을 끝없이 경험케 하는 중요한 결정적 동인은 아닐까? 그 모든 것이 그들을 찾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뭔가 깊은 어떤 경험, 체험과 함께 깊디깊은 감사함도 동시에 우러나게 하는 것은 아닐까? 말로 쉽게 표현하고 설명키 어려운 그 모든 경험을 촉발, 유발시키는 배경에 “참으로 아름답고 위대한 재일동포민족교육운동”이 키워내는 우리학교학생들의 그 모든 진실, 그 어떤 큰 진실이 혹 결정적 이유는 아닐까? 그런저런 모든 경험을 지난 15년 수도 없이 반복하며 재일동포민족교육운동에 대해 쓰고 말할 때마다 “아름다운 참으로 아름다운” 혹은 “참으로 아름답고 위대한”이란 수식어와 함께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는 깊은 감사와 존경, 사랑의 인사를 재일동포들님들께 삼가 드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80년 민족교육운동사 배경에 세상이 모르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지난 80년 재일동포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운명과 숨결을 함께한다’는 바로 그 “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1957년 4월부터 2026년 4월까지 한번도 멈춤 없이 70년 내내 재일동포들에게 보내주는 ”교육원조비와 장학금” 이야기다. 재일동포장학금이야기를 하기 전 우리는 혹은 세상은 먼저 재일동포들에게 “조국이 첫 장학금을 보내준 1957년”이란 시기에 대해 그 시대가 조선에겐 당시 어떤 시기였는지를 열린 마음으로 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주지하듯 첫 장학금을 보낸 1957년 그때는 1950-53년 당시 세계유일핵무장국가 미제가 주도한 서양제국집단의 침략전쟁에 맞서 “맨손으로 싸우다시피” 한 “조국해방전쟁”에서 북녘동포들은 민족의 존엄과 국권, 영토는 지켜냈으나 그러나 수도 평양을 비롯 전국의 도시들은 거의 모두 초토화되다시피 한 나라를 다시 맨손으로 새롭게 건설하던 시기다. 그 시기가 참으로 어렵고 어려웠을 것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제국주의침략자들이 당시 잿더미로 변한 조선을 두고 “100년 되도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 장담했을 정도니 “조국이 첫 장학금을 보내줬다”는 1957년 곧 1950년대 중반 조선의 처지에 대해선 더 설명할 나위가 없을 것 같다. 그렇다. 한푼두푼이 어려웠을 하여 심히 모든 것이 궁핍하고 궁핍했을 시기란 사실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런 처지, 절박하리만치 어려웠을 그런 처지에서도 그러나 “조국은 1억 2,109만 9,086엔”에 달하는 첫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보냈다? 글쎄? 얼른 상상키 어렵다. 세상에 그와 같은 전례가 있었을까? 없다. 세상 그 어디서도 같은 전례는 찾을 수 없다. 재일동포민족교육운동을 두고 언젠가부터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인류사 초유의 위대한 전대미문사건”이라 소개하고 정의하게 된 이유다. 그런데 그것 뿐일까? 앞에서 언급했듯 ‘조국이 보내주는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은 “1957년부터 오늘까지 단 한번도 멈춤이 없었다’. 그렇다면 “1990년대 후반” 조선 스스로 “고난의 행군” 시기라 부른 그때는 어땠을까? 그때도 보냈을까? 어땠을까?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이라 불린 극한의 시기에도 그러나 재일동포장학금만은 멈추지 않았다
재일동포들이 “꿈에도 잊지 못하는 조국” 그 조국은 물론 그때도, 바로 그 극한의 시기에도 보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재일동포들에게 보내는 교육원조비와 장학금만은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1990년대 후반은 주지하듯 1991년 소련방해체 뒤 동서냉전구도가 빠르게 해체되며 동구사회주의진영도 함께 붕괴하던 시절 스스로 “세계유일초강국” 자처하며 등장한 워싱턴 군홧발 밑에 가히 온 세상이 굽실거리고 저항하던 나라들은 무참히 짓밟혔던 시절이었다. 하여 그 시기는 유엔안보리 등에 업고 “고립압살 통한 정권교체” 목적 위해 “북핵문제”란 빌미 조작(명분 만들어) 조선에 대한 완벽한 경제봉쇄와 제재에 기초한 고립압살구도가 단단히 뿌리를 내려가던 시대다. 그 고삐는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 서거 뒤 더더욱 바짝 조여지기 시작했다. 김 주석 서거 뒤 90년대 후반 조선은 뜻밖에도(?) 한해도 거름 없이 매년 계속된 “자연재해”(?)까지 겪으며 극한의 고립무원상황을 극복해가던 과정을 가리켜 “고난의 행군” 시대라 칭했을 정도로 상상키 어려운 과정을 지나던 시기였다.
참고로 영문독립언론들은 최근 “자이오니스트유대제국”(Zionist Jewish Empire)의 오래동안 숨겨졌던 “기후무기.기후전쟁”(Weather Warfare)의 천인공노할 범죄를 낱낱이 폭로하고 있다. 대안독립언론들은 “테러범죄국가 유대제국” 이스라엘의 사악한 범죄들을 최근 더욱 온 세상에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기후전쟁과 기후무기는 이제 더 이상 소위 “음모론자들”의 주장만 아니다. 더 이상 공상소설에나 나옴직한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인류범죄에 속하는 사악한 기후조작범죄”는 오늘 워싱턴 앞세운 채 “인류사 최대최악의 국가테러범죄”를 자행하는 이스라엘이 이란을 상대로 벌이는 중동침략전쟁과정에서도 속속 폭로되고 있다. 2026년 중동전쟁 거치며 세상은 한편 조선이 1990년대 후반 내리 겪은 자연재해가 ‘자연재해’가 아니라 “조선에 대한 기후전쟁이었다”고 고발하는 영문독립언론인들과 학자, 전문가들의 주장과 고발을 새롭게 다시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1990년대 후반 바깥세상에 하루가 멀다고 “아사설”과 함께 끝없이 나돌던 “붕괴설” 등은 조선이 90년대 후반 [제국주의기후전쟁이 목적한] 자연재해(?)까지 겪으며 극한의 도전과 씨름하던 당시 상황을 악용, 조선에 대한 고립압살과 정권교체의 고삐를 더욱 바짝 조여가던 제국주의자들의 “조선악마화” 곧 “선전전”(Propaganda Warfare) 차원에서 이해해야 옳다. 기후전쟁.기후무기문제를 위에서 짧게 다룬 이유는 앞에도 언급했듯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시기가 조선에게 과연 어떤 시대였는가를 객관적 사실에 입각해 열린 마음으로 되돌아볼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1990년대 후반 조선은 한푼두푼조차 아끼고 또 아껴야 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극한 상황에서도 조선은, 조선의 국가최고지도자는 재일동포들에게 보내는 교육원조비와 장학금만은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상상키 어려운 극한의 상황이었을 1957년에도 조선정부가 첫 장학금을 보냈던 것처럼 1990년대 후반 또 다른 극한의 상황 때도 조선은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재일동포민족교육 관련해선 그 어떤 예외도 두지 않은 것이다. “장학금으로 보낼 돈을 올해만큼은 나라살림에 보태야 한다며 장학금 보내는 것을 한사코 만류한 일꾼들을 국가최고지도자가 나서 그들을 설득하면서까지 장학금 보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1990년대 후반의 감동적 일화도 전해진다. 올해 2026년 4월에도 재일동포들의 조국은 예외없이 장학금을 보냈다. “조국이 보내주시는 장학금이야기”를 할 때마다 재일동포들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이유다. 한편 재일동포들이 꿈에도 잊지 못하는 조국이 민족교육 위해 70년 보내준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의 총액은 과연 얼마나 될까? 조선대학교 산하 조선문제연구센터자료에 의하면 첫 장학금은 1957년 4월 19일 보내졌다. 당시 액수는 1억 2,109만 9,086엔이었다. 70년 전 시작된 조국의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은 2026년 4월에 보낸 것까지 합해 모두 172차례 계속됐다. 올해 4월에 보내준 장학금(3억 1636만엔)까지 합하면 조국이 70년 내리 재일동포들에게 보내준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의 총액은 모두 503억 495만 390엔에 달한다.
김일성 주석과 이후 계속된 조선정부의 재일동포장학금정책과 리승만의 “기민정책(棄民政策)”
제국주의침략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나라를 맨손으로 다시 건설하던 참으로 어렵던 시기였음에도 조선은 식민지노예로 끌려갔다 해방 뒤에도 일본에 남을 수 밖에 없게 된 수십만 조선동포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민족교육운동 위해 위에 소개한 것처럼 1957년 첫 장학금을 보내는 국가적 결단을 내렸다. 1950년대 후반 김일성 주석에 의해 시작된 조선정부의 재일동포장학금정책은 이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오늘 김정은 국무위원장에 이르기까지 70여년 그 어떤 조건, 처지, 상황에도 단 한번도 멈춤없이 계속됐다. 70여년이란 그 장구한 세월, 그 어떤 도전과 시련,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한치도 물러섬 없이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반면 미제국군에게 점령당한 채 미군정 지배하에 놓인 남녘세상은 어땠을까? 해방 전부터 런던. 워싱턴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기획하고 실천에 옮겨 상황에 따라 이런저런 식민지주구들 앞세워 세상에 내놓은 하여 차마 “국가”라 할 수조차 없는 식민지였기에 세상에서 “미국제조국가”(ROK Made in USA)라 놀림 받는 대한민국은 해방 직후 일본에 체류하던 약 ‘200만’ 우리민족 관련 어떤 정책을 펼쳤을까? 주지하듯 그들은 “기민정책”이라는 기상천외한 정책 아닌 술책을 세상에 내놨다. 기민(棄民)의 ‘기’자는 물론 버릴 기(棄)자다. ‘제 민족을 버린다’는 정책이랄 수 없는 계책을 내놓은 것이다. 정책이란 단어를 쓸 수조차 없는 하여 범죄에 다름없는 그것도 제 민족을 나 몰라라 한 민족범죄를 정책이랍시고 세상에 내놨던 것이다. 그와 같은 경우가 세상 어디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범죄다. 민족범죄다. 그러나 제국주의가 허수아비들 내세워 지배하는 식민지들 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물론 찾기 어렵다. 리승만은 세상곳곳의 그저 그렇고 그런 또 다른 하나의 “식민지대리인”에 불과했을 뿐이다. 물론 그는 그렇게 쓰이다 버려졌다. 세상에 숱한 또 다른 제국주의 식민지주구들처럼!
민족대표단일정 내내 쌓인 그 어떤 깊은 감정이 마지막 날 “대표단막내”를 펑펑 울게 하다
민족교육기관답사 전기간 재미동포들과 재일동포들의 만남과 대화는 쉼없이 계속됐다. 그 과정 대표단 전원은 위에 소개한 저자의 15년 경험과 근본에서 서로 다르지 않은 경험들을 했다. 조대부터 유치반, 초중고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표현키 어려울 정도로 해맑고 밝은 우리민족 3세, 4세, 5세, 6세, 7세 학생들과 만나고 대화하는 과정 기본 모두 같은 경험을, 같은 체험을 계속했다. 대표단막내(미국에서 대학시절부터 분단문제, 통일문제, 반제자주문제를 붙들고 오늘도 씨름을 계속하는 50대 후반 자영업자)가 일정을 끝내고 돌아가 보낸 편지에서 밝힌 그의 감상문을 그가 쓴 표현 그대로 소개한다: “아직도 재일동포들을 방문한 감동과 기쁨에… 나날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대표단막내가 공유한 대표단 모두가 함께 체험한 경험은 3월 2일 민족교육기관 첫 참관이었던 나가노현 소재 나가노초중급학교참관 때 시작됐다. 그렇다. 바로 그 때부터다. 대표단 모두의 마음 속 깊은 곳 어딘가에서부터 촉발되기 시작한 그 어떤 깊은 감정들은 민족교육기관참관이 거듭될수록 더욱 진(찐)해지면서 폭발적으로 증폭된 것 같다. 그런 여러 감정이 빚어낸 깊은 감동과 솟구쳐 흐르는 눈물을 주체키 어려웠던 경험은 3월 8일 절정에 달했다. 대표단 전체일정 후반부에 배치된 일요일 8일 오전 조선대학교 졸업식에서 폭발하듯 표현됐다. 정확히는 졸업식 뒤 이어진 졸업생들에 의한 졸업축하공연 때다. 대강당 중앙에 배치된 대표단 좌석 바로 뒤에 앉았던 한 대학간부 눈에 띨 정도로 폭발했던 것 같다. 그 광경을 목격한 대학간부는 “대표단 한분이 펑펑 우시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진실 앞에선 우리민족 타민족 남녀노소 기본 모두 같다. 진실 앞에서 모두가 ‘울보’된 경험
3세, 4세, 5세, 6세 조대학생들의 한없이 맑고 깨끗한 웃음과 모습을 끝없이 접하며 앞에 길게 소개한 ‘참으로 아름답고 위대한 민족교육’이라는 표현과 정의는 지난 사반세기 해와 달이 바뀌고 날이 지날수록 더욱 구체화됐고 확신은 더욱 깊어져갔다. 강의실에서 만나는 학생들에게서 받는 깊은 감동과 그로 인한 표현키 어려운 그 어떤 복합된 감정들이 촉발시켰을 하여 주체키 어려울 정도로 솟구치는 눈물과 씨름하고 또 씨름하다 조대에서 일한 지 몇 년 안되 “울보교수”라는 별칭까지 얻게 된 이유다. 오늘 답사기 저자에겐 재일동포민족교육을 두고 참으로 아름답다 위대하다 등 묘사, 표현, 정의는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부족하면 부족했지 결코 지나치지 않은 표현들이다.
조선대학에서의 15년 내내 총련조직과 대학의 지지.협조 속에 십여 년 가까이 미국대학생들과 그들을 인솔한 교수들의 조선대학방문프로그램을 매년 꾸준히 조직할 기회가 있었다. 그 과정 뜻밖의 경험을 반복해서 체험했다. 2018-19년 시작된 미국대학생들과 조대학생들의 첫 교류만남 때부터 이후 계속되는 경험이다. 미국대학생들과 조대학생들의 첫만남 때부터 계속된 경험이다. 1주일 체류일정을 끝내고 떠나기 전날 늘 가진 송별만찬 때 경험이다. 그때마다 미국학생.우리학생 모두 다 ‘울보’가 된 경험이다. 예외는 없었다. 민족, 언어, 문화, 정치사회구조 등 그 어떤 벽, 차이, 경계도 그들이 함께 체험하고 경험한 그 어떤 진실, 그들을 순간 모두 하나되게 만든 그 어떤 더 큰 진실 앞에선 장애로 기능하지 않았다. 미국대학생들과 조선대학생들 사이엔 그들 사이 그 어떤 민족적, 문화적, 언어적, 이념적, 국가적 벽, 차이, 경계도 그들이 하나됨을 막지 못했다. 미국대학생들과 조선대학생들이 어깨동무한 채 함께 울고 웃으며 모두가 “울보”가 된 경험은 매년 계속됐다.
‘울보’가 된 건 “학생”만? 아니다. 교수도 그리고 해외동포도 마찬가지로 모두 ‘울보’가 됐다
학생들만 울보가 됐는가? 아니다. 교수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경험을 밖으로 학생들처럼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진 않았지만 근본에서 그들도 학생들과 같은 경험을 했다. 그러면 해외동포들은 어땠을까? 멀리 러시아부터 중국, 미국, 캐나다 등 세상곳곳 여러 지역에서 온 다양한 배경의 우리민족들은 어땠을까? 2016년 조선대학교 60주년 기념대회 때 해외동포운동대표들로 구성된 축하대표단을 조직했을 때다. 그때도 미국대학생교수방문 때와 근본에서 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총련중앙과 재일동포들 그리고 조선대학은 “총련사에 처음 있는 일”이라며 대단히 기뻐한 행사였다. 대학의 60주년 기념대회를 마치고 인근의 니시도쿄 제1초중급학교를 참관했을 때다. 해방 뒤 니시(서)도쿄지역에 제일 먼저 세워진 올해로 80주년을 맞는 초중급우리학교다.
한두시간에 걸쳐 유치반부터 초중생들 수업참관을 마치고 강당에서 민족무용과 노래가 곁들여진 학생들에 의한 대표단환영공연 뒤 교장 안내로 2층 도서관에서 당시 니시도쿄 본부위원장도 참가한 동포들과의 자연스런 대화마당이 열렸다. 그 자리엔 조대교수도 몇 참가했다. 조그마한 도서관에 ㅁ자형으로 책상과 의자들이 놓여진 곳에 모두 둘러앉았다. 20여명 해외동포대표단원 나이는 당시 5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했다. 다양한 나이차이에도 대표단 모두 재일동포들과 스스럼없이 자연스레 소감을 주고 받을 때였다. 한사람씩 차례로 돌아가면서 소감을 나누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대표(재중조선족)차례가 왔다. 그는 재중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으로 당시 50대 후반이었다. 중국연변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기업을 일구며 한편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경제학박사학위까지 받은 기업인 출신 학자전문가다. 그는 최근 조선경제전문가로 이름이 높다.
그런 그가 자기차례가 왔을 때 아무 말이 없었다. 아무런 말이 없는 채 탁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침묵을 깨곤 마치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냥 ‘엉엉’ 울었다. 그는 그때 마치 통곡하듯 정녕 엉엉 울었다. 학교장도 본부위원장도 해외동포들도 조대교원들도 모두 말을 잃었다. 그가 울음을 멈출 때까지 모두 그냥 조용히 기다렸다.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그날 그는 헤어질 때까지 그 어떤 말도 없었다. 아니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아니 못했다고 해야 옳을까? 그 일은 그날 하나의 사건이 됐다. 해외대표단은 물론 대화에 참가한 재일동포들도 본부위원장도 학교장도 조대교원도 아무 말 못한 채 엉엉 울기만 한 조선족대표의 손을 잡은 채 눈물과 덕담으로 격려하며 대화마당을 마쳤다. 그는 그날 학교를 떠나며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학교장에게 봉투를 남기고 갔다. 행사를 조직한 사람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당시 적지 않은 돈(달러)을 학교에 희사했다. 아무도 모르게 그 누구에게 아무 말도 없이 그는 그날 그냥 조용히 귀한 선행을 하고 떠났다. 민족교육 받은 3세, 4세, 5세, 6세 재일동포학생들 앞에선 미국대학생들도 60 다 된 조선족기업인도 곧 우리민족 타민족 관계없이 모두 그 어떤 크나큰 진실 앞에선 기본 모두 누구나 같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케 한 사건이었다.
80년 전 민족교육운동을 개척하신 “총련결성세대 1세 재일동포들”에게 어떤 평가를?
8.15해방 뒤 남녘의 고향 대신 북녘의 “사회주의조국”을 자신의 새로운 조국으로 선택한 수십만 재일동포 1세들에 대해 재일동포후대만 아니라 우리민족 특히 해외동포들은 오늘 어떤 평가를 내려야 옳을까? 그분들의 수고와 희생, 위대한 헌신에 어떤 해석과 평가를 드리는 것이 옳을까? 그분들의 수고와 땀으로 80년 뒤 오늘 더욱 아름답게 활짝 꽃핀 해서 참으로 아름답고 위대한 민족교육운동을 당시 선두에서 개척한 “총련결성세대”라 불리는 1세 재일동포들에 대해 세상은 어떤 평가를 드리는 것이 옳을까? 식민지종주국에 노예처럼 끌려간 조선민중에 의해 시작된 인류사에 전무한 위대한 민족교육운동을 개척하고 주춧돌을 놓느라 평생을 온갖 도전, 역경과 싸우면서도 굴함 없이 민족교육을 지켜오신 총련결성세대 업적을 세상은 어떻게 평가하고 정의해야 옳을까?
재일동포 1세 결성세대들은 “조선을 조국으로 삼은 이유로, 평생을 총련동포로 산 것 때문에” 80-90 되도록 꿈속에서도 못잊는 남녘고향을 찾아갈 수조차 없었다. 꿈에도 잊지 못한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한 채 운명을 달리하신 1세동포 수는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도 거의 대부분 아니었을까? 그분들의 그 위대한 헌신과 용기, 희생과 함께 한편 조선사람으로 살아가는 높디높은 긍지와 존엄, 굳은 신념과 의지를 두고 후세는 어떤 평가를 드리는 것이 옳을까? “참으로 아름답고 위대하다”란 평가를 드리는 것이 과한 것일까? 아니 오히려 그분들의 위대한 삶과 투쟁을 그리 해석하고 정의해야 옳지 않을까? 아니 그리 정의하고 해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없다! 없다 믿는다.
민족통신대표단 답사기 집필기회를 빌어 재미동포 포함 동세대 모든 해내외동포님들께 삼가 묻게 된다. 위대한 재일동포민족교육운동 관련 1세 결성세대 재일동포님들께 그리고 결성세대 뜻을 이어 80년 지난 오늘도 초심을 잃지 않고 민족교육을 아름답게 지켜가고 있는 2세 3세 4세 5세 모든 분들께 같은 민족으로 깊은 존경과 함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것이 옳지 않은가 조심스레 묻게 된다. 답사기 저자 포함 일본 밖 세상여기저기 해외동포들이 80년 지난 오늘이 되어서야 비로소 재일동포들을 찾아와 드리는 뒤늦은 참으로 많이 뒤늦은 오늘 찾아와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사와 존경의 인사를 깊은 죄송함과 함께 삼가 드리는 것이 옳다 여겨지기 때문이다. 8천만 우리민족은 물론 800만 해외동포 모두에게서도 대를 이어 오래오래 칭송 받아 마땅한 큰 수고와 희생을 하신 재일동포 1세 결성세대동포님들께 뒤늦게라도 깊은 존경과 감사를 표함이 천만번 옳다 믿기 때문이다.
참으로 아름답고 위대한 재일조선인사회와 민족교육운동을 같은 민족인 우리만 그리 칭송하고 고마워할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조선대학 중심으로 전국각지 재일동포민족교육기관들을 꾸준히 찾아가고 있는 대한민국과 중국, 러시아, 서양과 일본 등 세상곳곳 양심들도 다르지 않다. 기본 같은 취지와 배경에서 깊은 존경과 함께 뜨거운 연대와 지지를 보낸다. 세계적 명성의 타민족 교육자들, 반제자주운동가들도 다르지 않다. 그들도 “세상에 참으로 모범이 되는 위대한 민족교육운동”이라 칭송하고 정의하길 주저 않는다. 그렇다. 주저함 없이 그리 평가하고 주장한다. 칭송 받아야 할 대상은 물론 재일동포1세뿐 아니다. 그분들의 아름다운 후대들 2세, 3세, 4세, 그리고 오늘 5세, 6세 후대들도 칭송 받아 마땅하다. 그 후대들 또한 1세 결성세대와 함께 오늘 재일동포민족교육운동을 더욱 아름답게 꽃피워가고 있는 “인류사에 전무한 세계사 유일의 해외민족교육운동”의 또 다른 주체들이기 때문이다. (2부에 계속)
(조선신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