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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영락태왕》에 대하여/조희승

2017년 10월 03일 11:50 력사

일본사람들치고 호태왕(광개토왕)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만큼 일본에서 광개토왕은 유명한 존재이다. 왜 그렇게 되였는가 하면 학교의 력사 및 사회과교과서들에 광개토왕릉비의 사진과 거기에 나오는 신묘년 (391년) 《도해파》(度海破) 기사가 사진과 그림으로 실리여 교육받아왔기때문이다.

일본의 력사교과서들에 광개토왕릉비 (일본에서는 호태왕비라고 부른다)의 사진을 받치면서 《임나일본부》(미마나미야께)설을 《증명》하는 최고의 《특등자료》로 취급됨으로써 임나설과 더불어 1억 일본인민의 《국민적상식》으로 되였기때문이다. 즉 《4세기 이전에 성립된 기내 야마또조정이 조선반도에 진출하여 남하하는 고구려와 격전을 벌려 조선반도의 패권을 다투었다. 그것이 호태왕비에 나오는 신묘년도해파 기사이다.》고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있다.

예로부터 조일사학계에서는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신묘년 도해파기사를 가지고 론쟁이 벌어져왔다.

우리 공화국력사학계에서는 광개토왕릉비의 신묘년 도해파기사에 나오는 《왜》가 일본학자들이 말하는것처럼 기내 야마또정권의 《왜》가 아니라 조선과 가장 가까운 북규슈에 있던 백제-가야계통의 정치세력, 구체적으로는 북규슈 이또지마반도일대에 형성된 가야소국이라는것, 당시 일본령토에는 통일국가가 형성되였다고 볼 아무러한 조건도 없으며 더우기 기내 야마또의 정치세력은 고구려와 맞설만한 정치적, 경제군사적수준에 도달해있지 못하였으며 그것은 고고학적자료들이 증명해주고있다는것, 이또지마 가야소국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가야계통 지명과 라이산 조선식산성과 가야계통고분 등 여러 고고학적자료들이 수없이 많다는것, 광개토왕릉비의 비문탁본을 맨처음 일본에 가져간것이 학자도 문화인도 아닌 일본륙군참모본부 성원이였던 사까이 가게아끼였다는것, 그때가 1884년경이였다는것, 사까이는 당시 군사첩보를 전문 맡아하면서 다가오는 청일전쟁을 도발하기 위한 자료를 얻기 위해 수많은 참모본부성원들을 조선과 중국, 압록강일대에 파견한 참모본부차장 가와가미 소로꾸(川上 操六 1848-1899년)가 직접 파견한 간첩이였다는것, 사까이가 가져갔던 릉비비문은 탁본이라기보다 모사도인 쌍구본이였다는것, 비문탁본은 일제의 조선 및 대륙침략을 위한 모략의 본산지인 륙군참모본부 지하밀실에서 어용학자들에 의해 조작되였다는것 등을 일본학계에 들이대였다.(김석형《초기조일관계 연구》1966년, 박시형《광개토왕릉비》1966년, 《광개토왕릉비문에 대하여》2005년, 《고구려이야기》2010년, 《<임나일본부>해부》2012년 등)일본학계는 우리 공화국학계의 문제제기에 충격을 받아 휘청거렸다. 그리하여 일제의 조선침략의 리론적《근거》로 된 《임나일본부》설은 붕괴되여가고있다. 따라서 이제는 력사교과서에 광개토왕릉비의 비문을 내놓고 게재하는 일은 점차적으로 없어져가고있다. 다만 례외적으로 우익적사상으로 만연된 《새 력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등에 의해 그것이 집요하게 되풀이되고있을뿐이다. 대표적으로 후소샤나 이꾸호샤에서 만들어진 중학교용 력사교과서들에 그것이 현저하다. 거기에는 구태의연하게 광개토왕릉비의 사진과 신묘년 도해파(度海破)비문을 제시하면서 《왜》의 조선반도 《진출》을 강조함으로써 반동적임나설(임나일본부설의 략칭)을 고취하고있다. 겸하여 더 말하면 이러한 교과서들에는 일제시기의 력사교과서들에서나 볼수 있는 사도장군의 하나라고 하는 《야마또 다께루》전설 등을 그림과 함께 기사내용을 게재하고있다. 이들이 조작된 일본《천황》의 조상이야기와 관련된다는것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다시말하여 《황국사관》을 고취하기 위해 이러한 허황한 내용들을 교과서들에 삽입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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