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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단결하면 반드시 승리한다/송암우

2013년 05월 08일 15:18 권리

4.24당시를 회고하며

4.24교육투쟁 65돐에 즈음한 여러 행사와 당시를 돌이켜보는 기사들에 접하면서 4.24의 추억이 자꾸만 떠올라 펜을 들었다.

내가 효고현히가시고베조선소학교(정식명칭 조련 히가시고베초등학원)에 입학하여 배움의 첫 걸음을 내디딘 때가 바로 1948년 4월 1일이였다.

그 당시는 4.24교육투쟁이 절정에 이르고있던 시기였다. 용감하게 싸우는 동포들의 투쟁모습과 야수처럼 탄압하는 일본당국과 미강점군의 만행을 직접 목격도 하고 체험하기도 하였기에 그때일을 어제일처럼 생생히 기억하고있다.

당시 히가시고베지역 葺合区, 生田区의 여러곳에 자그마하게 개설되였던 국어강습소 등이 통합되여 일본학교인 二宮小学校 교사를 일부 빌려서 입학식을 하였다. 비록 일본학교의 시설을 빌린 상태였으나 우리 학생들은 물론 학부모, 동포들은 후대들이 우리 말과 글로써 자기 나라 력사와 지리, 문화와 전통을 배우게 된다는 기쁨으로 기세충천하였다. 나다(灘)지역 동포들도 일본학교의 일부 시설을 빌려 소학교를 운영하였다.

그런데 입학해서 며칠도 안되는데 일본정부와 지방행정당국이 조선학교를 페쇄하려고 덤벼들었다.

일본당국이 조선학교를 몰수하려고 아침저녁으로 달려들기때문에 조련의 지도밑에 매일 민청원들이 교문앞에서 지켜서고 밤에도 학교에서 숙식하였으며 학생들은 학부모들의 보위밑에 집단적으로 등하교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무렵 경찰은 학교내의 여러 교구들에 《사용금지》라는 딱지를 붙였다. 교원들은 그것을 무시하고있었다.

그러던 4월 23일, 히가시고베, 니시고베, 나다의 3 학교를 경찰이 습격하였다. 히가시고베에서는 아침 일찌기 수백명의 경찰대가 느닷없이 달려들어 교원들과 민청원들을 곤봉으로 때리고 수갑을 채우고 체포하였으며 교원실과 교실의 책걸상, 흑판 등 교구들을 몽땅 자동차로 실어가버렸다.

이 소식을 듣고 학교에 동포들이 달려왔을 때는 학교안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울타리를 넘어서 운동장에 뛰여든 동포들은 마구 얻어맞고 체포되는 란장판이 되였다.

우리 어린 학생들도 학교에 모여들었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 참혹한 현장을 목격하면서 우리가 조선사람으로서 배우고 자라는것을 가로막는 원쑤가 누구인가 하는것을 아직은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어린이였으나 명백히 깨닫게 되였다. 이것을 지금도 잊지 않고있다. 결국 히가시고베와 나다 학교는 몰수당하였다.

이날 니시고베소학교(神楽小学校내 일부 교실을 사용)에도 경찰대가 덤벼들었다. 학교를 지키고있었던 동포들과 민청원들이 《고추가루수류탄》을 던지고 몸싸움도 벌려 학교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내였고 그 어간에 수천명 동포들이 경찰대를 역포위하여 격퇴하고말았다. 조선학교의 존재는 위기에 처하였다.

다음날 4월 24일 아침 큰누나가 여느때와 달리 매우 긴장된 표정으로 《어서 밥먹고 같이 가자. 우리 학교를 빼앗기느냐 지켜내느냐 하는 <판가리싸움>이 벌어지는데 어리다고 해서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 현청으로 가자.》고 나의 손을 붙잡고 작은누나와 함께 집을 뛰쳐나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인차 가겠으니 어서 가보라고 흥분된 어조로 웨쳤다.

당시 우리 가족은 산노미야(三宮)역근처에 있던 집단부락에 살았으므로 걸어서 효고현청으로 향하였다. 현청앞에 모여든 동포들은 수천명이나 되였으며 그속에는 학교 선배들도 있었다. 나중에는 3만명이상이 집결하였다.

그 시각에는 벌써 동포들의 대표가 현지사와 담판하기 위해 청사안에 있었다. 동포들은 그 결과를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면서 《조선학교를 인정하라!》, 《민족교육을 지키자》 등의 구호를 부르며 현측에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우리 동포들의 기세는 높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주먹이나 흉기를 들고 경관이나 관리들에게 폭행을 가하지 않았다. 자제력이 있었고 통솔이 잘되여있었다.

그런데 미점령군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고있던 일본경찰당국은 동포들을 강제해산시키려고 소방차를 내세워 동포들에게 마구 물을 쏟아붓는 실력행사에 나섰다. 동포들은 온몸이 물에 젖으면서도 스크람을 짜고 질서있게 버티면서 구호를 웨치고 또 웨쳤다.

그때의 일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소방차는 먼저 동포들의 얼굴에 물을 퍼붓고 눈이 안보이는 상태로 만들어놓은 다음에 발을 겨누어 동포들이 서있지 못하게 만드는 수법으로 탄압하였다. 그러나 동포들은 인내성있게 투쟁을 계속하였고 현지사와의 담판을 떠밀어주었다.

저녁무렵, 지사실의 창문이 열려 어느 녀성이 두팔로 큰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승리의 신호》를 보내였다. 동포들은 《이겼다. 현지사가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하며 기쁨을 금치 못해하였다. 동포들의 목소리는 삽시에 퍼져 《만세》소리가 현청앞광장에 우뢰처럼 진감하였다.

현지사와 담판을 한 대표들이 청사밖으로 나와 지사가 수표한 《4월 10일에 발포한 학교페쇄령은 이를 철회한다.》는 문장이 랑독되였다.

《비상사태선언》하에서 벌어진 4.24투쟁이 얼마나 간고한 투쟁이였는가. 또 얼마나 자랑스러운 승리였던가.

그런데 당시는 변변한 교사도 없었고 교원들도 모자랐다. 동포들의 생활형편도 말이 아니였다. 게다가 조선전쟁을 일으키려는 미제와 그 지휘하에 있던 일본반동들의 탄압을 계속 강화되였다. 그런 애로와 난관속에서 우리 동포들은 민족교육을 고수발전시켜왔다.

지금도 총련사업과 민족교육을 둘러싼 상황은 어렵기는 하나 이렇게 어려운 때일수록 《4.24교육투쟁정신》을 다시한번 새기고 활동해야 하리라고 본다.

총련을 허물어버리려는 반동세력들은 그 생명선인 민족교육사업을 파괴, 약화시키려고 별의별 수작을 다하고있다. 일본당국은 지금도 《고등학교무상화》에서 우리 조고학생만을 제외하는 차별정책을 취하고있으며 의무교육대상인 우리 조선초중급학교를 법적으로 인정하지도 않고있다. 이러한 그릇된 일본당국의 처사를 완전히 철회시킬 때까지 투쟁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일본인민들과 전세계 선량한 인민들의 지지를 받도록 힘쓰면서 신념을 바로가지고 단결하여 싸우면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는 그 4.24정신으로 분투해나가야 할것이다.

(총련 지바현본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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