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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문】《재일동포의 민족무용을 생각한다》/박정순

지난 10일, 조선대학교 기념관 강당에서 진행된 조대 조선문제연구쎈터설립 1주년기념심포쥼 《해외코리안의 민족문화와 통일의식-새로운 〈통합〉모델에 관한 인문학적성찰》에서 발표된 조대 교육학부 박정순교수의 론문 《재일동포의 민족무용을 생각한다》(요지)를 소개한다.

해방후 60여년, 조국과 고향을 모르고 이국에서 나서자란 3세, 4세 재일조선인들속에서도 조선무용은 민족의 흥취와 멋이 스민 예술로서 대중침투성과 미학정서적감화력으로 하여 동포사회에 확고히 뿌리박고있다.

본 론문에서는 재일조선인 특히는 총련계 동포들속에서의 민족무용의 보급과 활동에 대해 보려고 한다.

현재 총련산하 동포들속에서 조선무용을 하는 수는 약 2,000명에 달한다. 여기에는 전문예술단체와 문예동, 녀성동맹, 각급 학교 무용소조 그리고 무용연구소 성원 등이 포함된다.

1955년 9월 22일 《해방신문》에 게재된 중앙문선대공연

1. 민족무용의 보급과 활동

일제식민지통치시기 민족말살정책으로 인하여 민족문화와 전통이 여지없이 파괴되고 말과 글, 이름은 물론 우리 노래와 춤도 무참히 짓밟혔다. 바로 그 시대에 조선무용의 이름을 세계에 떨친 사람이 최승희였다. 재일조선인무용가의 제1세대인 임추자,리미남씨들은 최승희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무용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였다고 한다.

해방후 1세예술가인 장비선생은 인력거에 풍금을 싣고 조선인부락을 돌아다니면서 《새아리랑》, 《릴리야》, 《애국가》, 《인민공화국선포의 노래》등을 가르쳤다. 또한 서묵선생(1세)은 연극을 기본으로 중앙문선단활동을 정력적으로 벌리였다.이 시기에는 문화공작대,문화선전대 활동을 통해 《양산도》, 《밀양아리랑》등의 민요와 《농악》, 《승무》 등의 민족무용들을 선보여 동포들은 흥에 겨워 춤판을 벌리기도 하였다. 특히 《농악대》활동은 일본 각지에서  학교건설과 동포생활권획득을 위한 투쟁,조국통일과 국교정상화를 위한 요청활동의 일환으로 활발히 진행되였다.

1960년대초 최승희가 만든 《조선민족무용기본》의 책과 영화필림이 나오자 재일조선무용가들은 귀국선안에서 조국의 전문가들한테서 동작을 직접 배움으로써 처음으로 조선무용을 알게 되였다.귀국선을 통해 보내온 수천벌의 무용의상과 수많은 소도구,무대공예품들과 음악들은 그후 1년사이에 도꾜와 오사까에서 진행된 3천명 대음악무용서사시를 통해 조선대학생들과 각급학교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대중적으로 보급되였다.1973년에는 국립평양만수대예술단의 첫 일본공연이 실현되였으며 1974년에는 재일조선인예술단이 처음으로 조국을 방문하여 가극 《금강산의 노래》를 전수받았다. 1980년대에는 조선무용의 본고장에서 배우고싶어하는 재일조선학생들을 위해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의 통신교육이 1984년부터 시작되고 1986년 12월 31일에는 새해 설맞이공연에 처음으로 재일조선학생소년예술단이 참가함으로써 학생들을 위한 민족무용교육도 보다 활성화되였다.1990년대에 들어서자 1996년부터 1998년의 3차례에 걸쳐 조국의 무용강사를 초청하여 《조선무용강습회》가 진행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높아가는 통일기운에 따라 재일동포민족무용축제《통일의 춤》도 2번에 걸쳐 진행되였다.그리고 2000년대에는 6.15이후 금강산가극단이 3번에 걸쳐 이남공연을 진행하였으며 학생들도 서울,전주에서 초청공연을 피로하였다.

2. 민족무용에 대한 의식

재일동포 각 세대들이 무용을 어떻게 배우고 어떤 마음으로 활동해왔는지 알아내기 위하여 세대별 인터뷰를 진행하였다.중앙예술단초창기에 《심청이》역을 맡은 김일순씨는 《동포들이 민족적인것을 목마르게 바라던 시기, 조선옷만 입어도 눈물을 흘리고 조선노래와 장단만 들어도 어깨춤을 으쓱으쓱하던 시기, 민족에 대한 자랑과 긍지, 일본의 노예가 아니라 해방된 민족이라는 자부심으로 조선무용은 열광적으로 환영받았다. 조선춤을 통하여 동포들은 민족적자부심과 자랑으로 단결하였으며 조선춤은 그만큼 커다란 힘을 가지고있었다.》고 말하였다.

재일조선무용가의 원로인 임추자씨는 《재일조선인의 무용활동도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1세들이 씨를 뿌리고 키운것을 우리 2세가 이어왔다. 1세무용가들이 귀국한탓으로 방향을 잃었을 때 조국에서 최승희가 만든 〈조선민족무용기본〉(1958)과 영화필림이 보내왔다. 거듭 보고 연구하면서 일본 각지의 조선학교와 동포들속에 전습하였다.》고 증언한다.

또한 리미남씨는 《도꾜조선제11학교(현재 니시도꾜조선제1초중급학교) 4학년때 김장안선생님이 배워주신 〈초립동〉이라는 무용을 지금도 기억한다. 6학년때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축하하여 〈복구건설의 춤〉도 추었다. 도꾜조선중고급학교시절에는 선배들과 1세무용가들이 조선춤을 가르쳐주었다. 재일조선인들의 무용은 민족교육이 있는한 보존되고 발전할것이다.》고 말하였다.

또한 조국에서 직접 무용을 배우고 동포들속에 보급한 2세대인 강수내씨(금강산가극단 안무가)는 《민족의 문화유산이나 력사로부터 소재나 모티브를 골라 조선무용을 세계에 발신하고싶다. 세대교체가 진행되는 속에서도 조선무용의 기본에 의거하면서 지금을 사는 동포들의 마음, 갈등, 희망, 생활을 형상해낸다. 재일조선인들의 무용은 철저히 민족적인것에 뿌리를 두어야 가치가 있다. 이것이 일본에서 조선무용을 지키고 발전시켜나가는 어려움이면서도 과제라고 생각한다.》 하고 문예동중앙 무용부장인 임수향씨는 《18살때 조국에서 직접 무용을 배우는 기회가 마련된 후 어디에 살아도 조선무용을 하며 발전시켜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에 있는 우리는 조선무용을 할 때 조국과 함께 호흡할수 있다는것을 다음 세대에 넘겨주고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3세, 4세가 되는 젊은 세대들은 《최승희의 〈풍랑을 뚫고〉를 형상하면서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더 알고싶다고 생각했다. 제주도인민들이 겪은 비극은 나에게도 직접 이어지고있음을 통감하였다.》(리화선, 금강산가극단 무용수), 《무용을 통하여 조선문화에 관심을 보이는 일본사람들도 있다. 지역의 민족행사로부터 여러 나라, 여러 민족 무용이 펼쳐지는 마당에서 조선무용을 더 넓히고싶다.》(계영순, 문예동도꾜 무용부장)고 말한다.

금강산가극단의 《사과풍년》

3. 차이를 넘어서

2000년 6월15일이후 금강산가극단과 재일조선학생소년예술단의 이남공연에서 민족무용을 놓고서 우리 민족이 하나임을 실감하였다.

《우리에게도 알려진바와 같이 치마저고리를 입고 등하교하는 조선민족학교 학생들이 일본인에에 의해 옷을 찢기우는 사건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내용으로 하고있는 〈회오리〉는 찢어진 옷 대신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다시 새 저고리를 입음으로써 강렬한 민족의식을 담아낸다. 재일조선 민족학교 학생들은 이북의 학생들과 류사한 교과내용을 배우고있고 한편으로는 이남 학생들과 류사한 사회환경속에서 자라나고있다. 그러므로 서로의 문화를 합쳐가는 과정에서 매개자의 역할을 훌륭히 해낼수 있을것이다.》(박인배, 한국민족예술인총련합 기획실장)

재일조선학생소년예술단의 력사적인 이남공연의 컨셉트는 《하나》, 즉《통일조국》이며《민족의 운명과 재일조선인인사회의 삶은 같은것》임을 보여주었으며 민족교육의 정당성과 예술소조활동의 성과를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민족21》2002년 10월호)

조국이 해방된 후 조선민족의 무용도 분단속에서 발전하였다. 분단의 비극속에서 동질감보다 이질감이 더해가는것처럼 보이는 상황속에서 2000년대의 북, 남, 재일의 문화교류는 조선무용의 기본은 같다는것을 확인하였으며 그 가능성을 찾아보게 하였다. (도표참조)

북, 남, 재일의 무용이 통일민족의 무용으로, 우리 민족무용의 다양한 종류와 형식으로 다 포괄된다면 조선민족의 무용문화보물고를 보다 풍부히 해줄수 있는것이 아니겠는가.  무용이 시대를 배경으로 민족성원들의 생활감정과 정서를 형상하는 예술이라면 이남에 보존되여있는 전통무용과 해방후 이북에서 개화발전한 최승희춤체를 살린 주체무용 그리고 해외동포들의 삶과 지향이 깃든 재일조선인무용이 합해진 우리의 민족무용은 그 레파토리가 더욱 풍부해질것이다.

(조선대학교 교육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