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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만경대학생소년궁전 성악지도교원 전혜영씨/인민배우가 택한 제2의 인생

《조국사랑, 변함없이 이어갑시다》

【평양발 김지영기자】전혜영 – 일본공연에서 총련노래를 절절히 불러 동포들의 눈물을 자아낸 《평꼬마》의 우상, 노래 《휘파람》으로 일세를 풍미한 보천보전자악단의 인민배우이다. 누구나 다 아는 명가수는 작년 8월부터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의 성악지도교원으로서 후대교육사업에 종사하고있다.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전혜영교원(평양지국)

또 하나의 희망

《성악지도교원과 가수는 다르다. 나에게 있어서는 초행길이니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고… 어린이들과 함께 배우면서 성장하고있다.》

예술과 체육, 과학탐구를 비롯한 과외활동의 거점인 만경대학생소년궁전에는 현재 약 5,000명의 학생들이 다니고있다. 음악부문에서는 성악을 배우는 학생들의 비률이 높다. 전혜영씨는 현재 소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6학년까지 20명의 학생들을 담당하고있다.

전혜영씨의 어머니는 국어교원이였다. 아버지도 중학교에서 청년동맹의 지도교원으로 일한바 있다.

《어릴적의 나의 추억은 동무들과의 <교원놀이>. 언제나 내가 <선생님>을 맡았다. 보천보전자악단의 가수로 활동할 때에도 언젠가 교원이 되는 희망을 실현하고싶다고 생각했었다.》

궁전을 다니는 학생들이 과외수업으로 받게 되는 성악교육은 가수양성을 위한것이 아니다. 음악의 전문교육은 전혜영씨가 배운 금성학원이나 예술학원과 같은 기관에서 받게 된다.

《나의 역할은 전문가가 아니라 지덕체를 갖춘 인재를 키우는것이다. 가수가 되지 않아도 사람들이 사회생활의 여러 장면에서 노래를 잘 부르면 얼마나 좋겠는가. 조선에는 <군중예술>이라는 말이 있다.》

궁전에서는 정기적으로 학생들의 기량발표회가 진행된다.

《잘못할 때면 안타까와서 <내가 나가서 부르는게 낫지>, 그러한 심정이 되기도 하지만 학생들이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을 때의 기쁨이란 이루 다 말할수 없다.》

천성의 개화

전혜영씨는 2∼3살때 텔레비죤에서 흘러나오는 가극 《피바다》의 노래 《울지 말아 을남아》를 누가 배워주지 않았는데도 잘 불러 동네사람들을 감탄시켰다고 한다.

유치원에 다닐 때 벌써 평양학생소년궁전의 아동반에서 노래를 배웠고 11살이 되는 해에는 학생들의 설맞이공연에서 처음으로 독창을 피로하였다. 그가 제2차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의 성원으로서 일본을 방문한것이 바로 이 해(1983년)이다. 설맞이공연에서의 독창은 그후 4년 련속으로 맡아하였다.

《수령님께서는 어린이들이 조금만 잘해도 제일 먼저 박수를 쳐주시였다. 장군님께서도 내가 수령님께서 기억하시는 어린이라 하시며 언제나 관심해주시였다.》

전혜영씨는 금성학원을 졸업하고 보천보전자악단의 중심가수로서 활약하였다. 령도자들의 배려와 인민들의 인정속에 그는 자기의 재능을 마음껏 꽃피웠다.

인민배우의 칭호를 받고 외국공연의 경험도 많은 그가 지금도 감회깊이 돌이켜보는것은 일본공연의 나날이다.

도꾜에서의 마지막공연에서 11살의 소녀는 《조국의 사랑은 따사로워라》를 목메여 불러 동포들이 꽉 들어찬 객석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연목이 끝난 후 예술단의 총연출가는 감정을 억제할줄 모르고 왜 울었느냐고 꾸짖어댔지만 소녀는 눈물을 흘린 까닭을 자기로서도 설명하지 못했다고 한다.

《동포들과의 리별, 귀국하게 되는 기쁨. 어린 가슴에 복잡한 감정이 엉킨것만은 사실인데 시간이 흐른 다음에 눈물이 흘러나온 리유를 생각해보니 공연을 앞두고 그 노래를 배웠을 때에 벌써 감동이 있었던것이다. 해외동포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돈을 보내주는 나라, 가까이에 있는 자식보다 멀리에 있는 자식을 먼저 생각하시는 령도자의 어버이사랑. 정말이지 그것은 조선에서만 있을수 있는 현실이다.》

조선의 긍지

전혜영씨는 외국공연의 무대에 설 때마다 《조선에서 태여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성공은 없었을것》이라고 생각하군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어린시절의 일본공연은 《조국의 고마움》을 이역의 동포들과 함께 간직하는 나날이였다. 그때 동포들은 평양에서 온 학생소년예술단 성원들을 친자식처럼 보살펴주었다.

《노래가사에 있는 그대로의 광경, 일본에는 령도자를 우러르며 자기 생활보다 조국을 먼저 생각하는 동포들이 있었다.》

예술단 성원들의 식사를 장만해주던 《녀성동맹의 어머니》들이 조국의 노래를 부르면서 《동포되찾기운동을 힘차게 벌리는 이야기》를 재미나게 들려주던 그 장면이 그립다고 전혜영씨는 말한다.

그때로부터 약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후대교육을 제2의 인생길로 정한 지난날의 《평꼬마》는 변화된 환경속에서 《동포되찾기운동》을 벌리는 총련의 일군, 동포들에게 진정이 어린 당부의 메쎄지를 보내였다.

《우리의 변치 않는 조국사랑, 이역에서도 그 뜨거운 마음은 대를 이어 꿋꿋이 계승되여나가리라고 믿는다.》

(조선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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