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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졸본과 국내성탐방기(상)/손문규

2012년 10월 29일 15:17 문화・력사

고구려의 옛 수도를 찾아서

우리 학교 력사교원들과 고대사에 흥미를 가지는 동포들 14명이 지난 8월 24일부터 4박 5일의 일정으로 고구려의 옛 수도 卒本(오늘의 桓仁), 国内城(오늘의 集安)의 유적력사탐방을 하였다.

고구려시조 고주몽이 나라를 세운 졸본땅과 그후 400여년간 두번째 수도 国内城이 자리잡았으며 広開土王陵碑가 있는 압록강중류도시 集安땅을 처음으로 찾게 된 우리 일행은 랑만에 넘치는 탐방의 첫날째부터 탄성을 질렀다.

력사의 고발장 《려순감옥》앞에서

피맺힌 원한이 깃든 旅順監獄

24일 오후 遼東半島의 항구도시 大連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안내원(조선족의 김동포)과 함께 뻐스를 타고 첫 참관지인 旅順을 향하였다.

료동반도는 그 옛날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 우리 민족의 력사가 스며있는 곳이다.

강상무덤과 루상무덤, 비파형단검 등 고조선의 유적과 유물들은 이곳 大連시 교외에서 발굴되였다.

旅順은 예로부터 널리 알려진 군항도시이며 19세기말~20세기초, 로씨야와 일본이 대륙침략을 위하여 각축을 벌린 로일전쟁의 격전지이다. 일제는 대련과 려순을 강점한 후 이 지역을 대륙침략의 거점으로 삼고 조중 두 나라 인민들의 반일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旅順監獄을 크게 확장하였다.

지금은 《려순일아감옥구지(旅順日俄監獄旧趾)》라는 이름으로 후대들을 교양하는 목적으로 보존되고있는 려순감옥에 수많은 반일민족운동가,항일혁명가들이 나라를 사랑했다는 죄 아닌 《죄》로 끌려왔었다. 어두컴컴한 감방, 잔인한 각종 고문기구들이 그대로 전시된 몸서리나는 방. 말그대로 일제의 야수성을 보여주는 력사의 고발장이다. 안중근의사가 사형당한 곳도 바로 여기다.

丹東과 고구려의 첫 수도 卒本

2일째 아침, 大連을 출발한 우리는 11시경에 조중국경도시 丹東에 도착하였다.

먼저 조국해방전쟁때 미제의 폭격에 의하여 절단난 鴨綠江断橋를 찾았다. 중국인민들의 抗美援朝의 뜨거운 마음이 깃든 투쟁전시물을 돌아보고 파괴된 대교우를 걸었다. 이 다리에서는 고려말기인 1388년,리성계가 《威化島回軍》사건을 일으킨탓으로 드넓은 遼東땅을 되찾을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것으로 이름이 알려진 威化島가 바라보인다.

점심때, 식당에서 평양랭면을 한그릇씩 먹고 《虎山長城》으로 향하였다. 조중국경을 한걸음으로 건늘수 있다는 《일보과(一步跨)》를 돌아본 다음 압록강물줄기를 따라 뻐스로 의주와 九連城을 지나갔다. 그곳은 宋,明,清나라시기 국경교역이 왕성히 진행되고 두 나라 사신들이 왕래하던 지역이기도 하다.연암 박지원의 명저 《熱河日記》 도강록에도 나온다.

우리가 공업도시 寛甸에서 잠시 휴식을 하고 桓仁시내에 도착한것은 밤 8시가 지나서였다. 저녁식사때, 조선족출신의 녀성안내원이 고구려의 첫 수도 卒本이였던 이곳 桓仁땅이 지금은 遼寧省 本溪市에 속하며 桓仁満族自治県의 중심지로 되여있다는것, 1424년 建州衛 제3대 령수인 李満住가 이주하여 살았다는것, 이곳이 清나라 발상지라는 사실들과 함께 고구려의 卒本城으로 확인된 五女山城에 대해 재미나게 해설해주었다.

밤은 깊어가는데 우리의 가슴가슴은 드디여 卒本땅을 찾은 기쁨으로 설레이기만 하였다. 흥분을 억누를수가 없는듯 몇몇 성원들은 숙소의 로비에 모여앉아 시간가는줄 모르고 고구려이야기를 나누었다. 력사교원들은 저마다 방에서 답사수첩에 보고 들은 사실들을 밤늦도록 적어나갔다.

난공불락의 오녀산성(전경)

웅장한 천연요새 五女山城

3일째 아침, 卒本川(渾江의 지류, 일명 沸流水)을 따라 五女山城 남쪽입구에 도착하자 끼여있던 안개가 사라지고 우뚝 선 산성의 그 웅장한 모습이 한눈에 안겨왔다.우리는 高句麗始祖碑가 세워진 산성입구로부터 걸어서 산길을 올라가려는데 뜻밖에도 눈앞에 백수십m가 넘는 가파로운 돌계단이 나타났다.

안내원은 산성유적을 제눈으로 보기 위해서는 돌계단 999개를 올라가야만 한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신들메를 든든히 매였다.

옹근 하나의 넓고 큰 돌바위우에 세워진 산성에 올라 주변들을 내려다보니 층암절벽들이다. 말그대로 난공불락의 천연요새다.

현지에서 발행되고있는 관광안내서를 보았다. 史実을 외곡한 부분도 있지만 그대로 소개한다.

《五女山城은 遼寧省 桓仁県의 동쪽으로 8.5km 떨어져있는 五女山에 자리잡고있으며 최고봉해발은 823m이다.력사자료에 의하면 기원전 37년 北扶余왕자 朱蒙이 卒本에 고구려정권을 세우고 五女山에 첫 도성을 구축하였는데 력사상 〈紇升骨城(흘승골성)〉이라 불리웠다.고구려정권은 이곳에서 40년을 존속하였다.五女山 산성평면은 구두장화모양으로 되여있는데 남북길이는 1,500m이고 동서너비는 300~500m로서 규모가 크고 체계가 완벽하다.》

안내서는 특히 현존하는 유적들이 풍부하고 자연환경이 신기하고 아름다우며 기묘하기 그지없다고 강조하고있다.

1996년, 중국에서는 五女山城이 全国重点文物保護単位로 지정되고 2004년 7월에는 《高句麗王城 王陵 및 貴族古墳》의 중요부분으로 세계문화유산명록에 올랐다.

산성유적의 견학은 먼저 西門유적지부터 시작하여 왕궁터유적으로 추측되는 《1호대형건축지》를 보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주몽은 오이,마리,협보 등 세 사람과 北扶余를 떠나 卒本川에 이르렀는데 그 지방의 토지가 비옥하고 산천이 준험함을 보고 드디여 도읍(都邑)으로 정하고 고구려를 세웠다. 《동명왕 즉위 4년 가을 7월에 성곽과 궁실을 건축하였다.》라는 《삼국사기》의 기사는 이 왕궁터유적을 말한것으로 되여있다.

그후 수원지로서 리용된 2m 깊이의 성수천지(天池)와 거주지터,군사들의 훈련장터 등 여러 유적을 돌아보았다.특히 산성의 남쪽끝에 자리잡은 点将台(진을 치고 군사들을 지휘하는 곳)에서 산성아래에 펼쳐진 경치는 참으로 볼만하였다. 산성에서 바라보면 멀리 沸流川이 흐르고 그 주위를 에워싸듯 험산준령으로 이루어진 비옥한 땅이며 아름다운 경치가 화폭으로 한눈에 안겨와 2,300년전의 건국당시의 졸본을 상상하기에 충분하였다.

우리는 산성의 유적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면서 동문에서부터 남문출구를 향해 내려갔다.병풍처럼 둘러싸인 큰 절벽의 바위, 가파로운 벼랑길, 설치된 돌계단과 철사다리. 우리는 철사다리로 한발자욱 한발자욱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100m 아래로 무사히 내려가니 산길이 보였다.

(조선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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