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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영화 《누치가후우(命果報) – 玉砕場에서의 証言》 박수남감독에게 듣다

《玉砕》의 미명아래 벌어진 학살/조선인군속, 《위안부》도 희생

《누치가후우(命果報)》는 오끼나와의 말로 《목숨이 있어야》라는 뜻을 가지고있다. 태평양전쟁 말기, 본도결전의 버림돌이 된 오끼나와전에서는 인구의 4분의 1에 맞먹는 주민들이 희생되였다. 거기에는 조선에서 강제련행된 군속들과 《위안부》 소녀들도 있었다.

재일동포 2세 영화감독인 박수남씨(76살)의 기록영화 《누치가후우-옥쇄장(玉砕場)에서의 증언》이 완성되여 각지에서 상영되고있다. 영화에는 이제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옥쇄》를 강요당한 조선인 군속과 《위안부》 등에 관한 27명의 귀중한 증언이 수록되여있다.

박수남감독(사진 김윤순기자)

박수남감독(사진 김윤순기자)

격동의 시대

박수남씨의 아버지는 1923년 류학을 목적으로 일본에 건너왔다. 그후 얼마 안있어 간또대진재를 겪게 되였지만 량심적인 일본사람의 도움을 받아 악몽같은 《조선인사냥》을 모면할수 있었다. 1935년 박씨는 미에현에서 태여났다. 해방후 아버지는 딸을 《훌륭한 조선사람》으로 키우기 위해 도꾜조선중급학교에 입학시킨다. 그런데 그 즉시로 조선학교페쇄령이 발포되여 수많은 경관들이 교내에 벌떼처럼 몰려왔다. 시커먼 제복을 입은 경관들이 닥치는대로 교원들과 학생들을 붙잡았다. 우왕좌왕하는 학생들속에 있었던 박씨는 돌연히 《도망치지 마! 우리들에게는 배울 권리가 있어!》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아버지벌이나 되는 경관을 똑바로 쏘아보며 《당신, 아이 아버지 맞지요.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있나요? 나는 며칠전까지만 해도 일본학교를 다녔어요. 지금 조선학교에서 자기 나라 말과 력사를 배우고있는데 그것을 어째서 안된다고 해요. 그 리유를 떳떳하게 말해보세요!》 하고 웨쳤다. 10대의 철부지 소녀가 겁도 모르고 대드는 모습에 경관은 잠시 말을 잃어버린것 같았다.

《그것이 나의 원점이였다.》고 박씨는 말한다.

그후 1956년에는 민족강사로서 시가현 오오쯔시의 膳所小学校와 醍井小学校에서 강제련행 등으로 일본에 끌려온 동포들의 아이들 약 100명에게 우리 말과 력사를 가르쳤다. 당시 동포들의 생활은 구차하여 신발이 없어서 맨발로 통학하는 아이도 있었다. 4명의 아이를 가진 한 가족은 제대로 된 집이 없어 마구간으로 쓰이던 곳을 판자집처럼 꾸며서 추위와 배고품을 이겨내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교원의 가방속에서 급식비용이 든 봉투가 없어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동시에 맨발소년도 종적을 감췄다. 사람들은 소년을 잡아내고 경찰에 끌고가야 한다고 야단쳤다. 박씨는 또 한명의 민족강사에게 없어진 돈을 자기들이 변상해서라도 그 아이를 지키자고 의논하였다.

일본군에 처형당한 동포들을 공양하는 이전 조선인군속들

진실을 기록

1년 반의 교원생활을 거쳐 박씨는 동포청년들을 대상으로 발간하는 월간 《새 세대》 편집부에 몸을 담게 된다. 당시 유일한 녀성기자였다.

1965년부터는 규슈 지꾸호(筑豊)의 탄광마을에서 살아남은 동포들의 경험을 듣고 글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취재를 통해서 《어머니 보고싶어. 고향에 가고싶어요.》 하는 글을 벽에 새긴 본인을 찾아내였다. 락반사고로 죽은 《꼬마비둘기》라고 불리우던 얼굴이 하얀 14살 난 소년의 글이였다.

《그 아이의 어머니를 만나고싶다고 쭉 생각해왔어요.》라고 박씨는 말한다. 때를 같이하여 히로시마의 피폭동포들을 찾아다니는 일도 시작하였다. 사회의 밑바닥에서 목소리를 조금도 낼수 없을만큼 가난하고 힘든 생활을 누릴수밖에 없었던 동포들곁으로 발길을 옮겨 한사람한사람과 진지하게 맞서며 그들의 무거운 입이 열리기를 끈질기게 기다렸다. 갖은 천대와 멸시속에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온 동포들의 표정이나 침묵 그리고 눈동자에 어슴푸레하게 비치는 《한》을 보고 박씨는 글로써만이 아니라 영상으로 기록할것을 생각했다.

박씨가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의 조선인피폭자를 취재하여 만든 영화 《또 하나의 히로시마》는 《피폭은 일본인만이 당한것》으로만 간주해오던 일본의 반전반핵운동에 큰 충격을 주었다. 자주상영운동은 일본각지에 퍼지고 1987년 原水禁世界大会에서 처음으로 조선인피폭자문제가 상정되여 동포피폭자에 대한 국가보상을 요구하는 결의안이 대회에서 채택되는데 이르렀다.

그후 박씨는 오끼나와반환의 해인 1972년, 《나는 속아서 渡嘉敷島의 위안소로 끌려갔다.》고 증언한 배봉기씨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의 호소는 전쟁터에서 성을 판다던 이른바 《창부》라는 종래의 정설이나 속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것이였다. 《이것은 국가에 의한 〈성노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 박씨는 그 진실을 영상으로 증명하기 위해 2번째 작품 《아리랑의 노래-오끼나와에서의 증언》을 제작하였다.

오끼나와하고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였다. 《오끼나와사람들에게 위안소의 소녀나 군속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싶다고 하자 〈당신은 가족인가?〉 하는 답이 돌아오군 했다. 나라를 빼앗겼다는 점에서 오끼나와와 조선은 같은 운명을 공유하고있었다》.

이국에서 굶어죽은 동료를 떠올리는 강인창씨

력사의 어둠

새로운 작품 《누치가후우》에는 당시를 아는 증인들의 귀중한 증언이 수록되여있다.

具志堅徳慎씨(당시 25살)는 싸이빤섬에서 조선인군속의 현장감독을 하고있었다. 《조선인들은 일을 잘했다. 상당한 량의 일을 하는데 먹을것이 없었다. 죽기전에 쌀밥을 먹고싶다고 하니까 군의 쌀가마니를 4섬 살짝 훔쳐서 먹였다》.

兼島菊江씨(당시 20살)은 《위안부》에 대해 《7명과는 매일 얼굴을 맞대고있었다. 그들은 어차피 자기들은 살아서 돌아갈수 없다며 눈물을 흘리고있었다. 〈미유끼〉언니는 21살, 〈미하루〉는 나보다 2살아래인 18살, 17살의 〈마찌꼬〉는 일본말을 못했다. 아이 엄마였던 〈아끼꼬〉언니는 〈군수공장에서 일한다.〉는 말에 속아서 끌려왔다. 어느 날 술을 마셨을 때는 〈아들이 있어 죽을수가 없다.〉며 울었다. 〈아리랑〉의 노래를 자주 부르고있었다.》고 기억한다.

영화에는 《아리랑》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여러번 나온다. 오끼나와전에서 살아남은 증인들이 흥얼거리는 《아리랑》이 멀리 고향을 떠나 몸도 마음도, 인간으로서의 존엄마저도 일본군에 가차없이 짓밟힌 조선의 소년, 소녀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위안부》들이 불렀던 《아리랑》을 부르는 오끼나와할머니와 악수를 한다.

영화에는 4명의 이전 조선인군속들이 오끼나와를 방문하여 자기 체험을 증언하는 장면도 수록되여있다.

김재성씨(당시 30살)는 阿嘉島에서 동료 7명이 굶주림에 못이겨 벼이삭을 훔쳐 먹은것이 발각되여 일본군에 의해 처형된 현장을 찾아내였다. 《량손을 꽁꽁 묶인채 땅을 파낸 구멍앞에 나란히 서서 東方遥拝를 강요당한 뒤에 총살되였다.》고 한다.

심재언씨(당시 24살)는 미군이 상륙해온 다음날,미군진지에로의 돌격을 강요당했다. 바위뒤에 50명정도의 동료들과 잠복하던 중에 일본군 소위(少尉)가 머리띠와 막대기를 하나씩 넘겨주면서 《머리띠를 목에 감아라! 닥치는대로 적을 죽여라!》고 명령하였다. 쪼그리고앉아 우물쭈물하고있던 그들을 보고 그자는 《빨리 안가면 내 손에 죽는다!》고 일본도로 위협하였다. 일어나보니 완전무장한 일본군인들이 량쪽으로 갈라져서 산을 내려가고있었다. 《우리들을 미끼로 해서 자기네들은 도망가려는거구나 싶었다. 그래서 나는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상영시간은 2시간 12분. 상영일정은 별항참조. (홈페이지=http://www.nutigafu.com/)

(김윤순기자)

상영일정

【오사까】シネ·ヌ―ヴォ

∼26일 18:40, 27∼11/2 13:00 TEL. 06-6582-1416

【오끼나와】桜坂劇場

27∼11/2 10:20, 15:50, 11/3 10:50, 11/4 10:00, 11/5∼9 10:50, 11/10∼16 10:20

※10/27∼30 감독 토크이벤트가 있습니다. TEL. 098-860-9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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