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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력사학학회 비망록 발표

2012년 05월 20일 17:17 공화국

《일본의 조선침략야망은 날이 갈수록 더해지고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력사학학회는 일본반동들의 재침야망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는 비망록을 발표하였다. 비망록은 다음과 같다.

일본침략자들이 임진전쟁을 도발하여 우리 인민에게 커다란 불행과 참화를 들씌운 때로부터 420년이 되였다.

임진전쟁은 철두철미 일본사무라이들의 령토강탈야망과 해외침략정책에 의하여 계획적으로 도발된 부정의의 침략전쟁, 력사에 류례없는 살인전쟁, 략탈전쟁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반동들은 임진전쟁을 공공연히 찬미하면서 군국주의를 선동하고 재침책동에 열을 올리고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력사학학회는 일본사무라이들이 도발한 임진전쟁의 침략적성격과 천인공노할 죄악을 까밝히고 날로 로골화되는 일본반동들의 재침야망에 경종을 울리기 위하여 이 비망록을 발표한다.

1. 임진전쟁은 일본사무라이정권의 조선침략정책의 범죄적산물

임진전쟁은 도요또미 히데요시를 괴수로 한 일본사무라이정권이 우리 나라와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침략하여 더 많은 토지와 재부를 강탈하려는 야망밑에 계획적으로 도발한 해외침략전쟁이였다.

15~16세기 일본에서는 권력과 재부를 강탈하기 위한 령주들사이의 싸움이 100여년간 지속되였다.

이 동란속에서 도요또미 히데요시는 여러 봉건령주들을 정복한후 1585년에 국정을 총괄하는 관백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자는 이미 오래전부터 조선에 대한 침략야망에 들뜬 호전적인 사무라이였다.

1577년 도요또미는 앞으로 규슈를 정벌하고 《그 군사로 조선을 치며 나아가서 명나라의 400여주를 차지함으로써 황국의 판도로 삼을것》이라고 호언하였으며 후날 세 나라(조선과 명나라, 일본)를 합쳐 하나로 하는것이 자기의 오랜 소망이라고 떠벌였다.(《일본전사》 조선역 구참모본부편, 《일본외사》 권15)

하지만 임진전쟁의 주되는 원인은 도요또미개인의 과대망상으로부터 생겨난것이 아니라 일본에 대두한 심각한 정치적위기와 사회계급적모순의 반영이였다.

1590년 도요또미정권은 전국에 대한 통일을 초보적으로 달성하였으나 날로 극심해지는 사회계급적모순의 해소와 정치적안정, 상업적리윤을 보장해줄수 있는 대외시장의 확대 등의 난문제들에 직면하게 되였다.

100여년간 계속된 내란은 인민들의 생활을 극도로 령락시켰을뿐아니라 봉건령주들의 불평불만을 야기시키고있었다.

도요또미정권은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을 도발하여 자국인민들의 반봉건투쟁의 예봉을 회피하고 사무라이들의 불평불만을 략탈과 치부로 눅잦히며 반대파령주들의 세력을 군사경제적으로 약화시키는 한편 많은 토지와 재부를 요구하는 대봉건령주들과 상인들의 야욕도 채워주려고 꾀하였다.

결국 정권을 유지하며 더 많은 령토를 차지하고 《대국》의 군주가 되여보려는 도요또미의 야심과 해외략탈, 상업적리윤을 추구하는 령주들, 부유상인들의 리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조선침략정책이 세워지게 되였다.

일본의 도요또미정권은 저들의 흉악한 령토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침략전쟁준비를 계획적으로 추진시키였다.

도요또미정권은 권력기반을 강화하고 해외침략에 절실히 필요한 병력 및 인부충당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토지와 호구조사놀음을 벌려놓았다.

한편 도요또미는 1586년 뽀르뚜갈선교사가 오사까성에 왔을 때 국내평정이 끝나면 명나라를 정복하고 일본의 리익을 늘이려고 한다, 그를 위해 전함 2,000척을 만들려고 한다고 하면서 무장장비가 좋은 뽀르뚜갈대병선 2척이 요구되니 알선해줄것을 부탁하였다. (《히데요시의 조선경략》 일문)

1590년에 이르러 일본사무라이들은 조선침략전쟁준비에 더욱 본격적으로 달라붙었다.

1591년 8월 말 도요또미는 조선에 대한 침략계획을 정식 발표하면서 침공날자를 다음해로 정하였다. 이 계획은 조선을 치고 이를 경유하여 명나라로 쳐들어간다는 극히 황당무계하고 침략적인것이였다.

도요또미는 장수들에게 인원과 병장기를 충분히 보장하고 군량을 확보할것을 지시하였다.

당시 병력동원계획에 의하면 33만여명을 징발하여 20만명 정도는 침략에 돌리고 10만명은 예비대로 나고야에 주둔시키며 3만명은 수도에 두기로 하였다.

도요또미는 침략무력을 준비하는 한편 1591년 1월 연해고을들에 명령하여 수천척의 전함과 수송선을 뭇게 하였으며 소 요시또모에게 쌀과 은, 병기, 화약 등을 주면서 침략군의 선봉과 길잡이를 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소 요시또모는 쯔시마에서 조선의 지리를 잘 알고 조선말에 정통한 40여명을 선발하여 여러 부대의 길잡이로 대기시켰으며 바다길안내자들도 준비시켰다.

1592년 2월 도요또미는 조선침략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조선지도를 만들게 하였는데 6가지 색으로 8도를 구분하여 《백국》(경상도), 《적국》(전라도), 《청국》(충청도, 경기), 《황국》(강원도, 평안도), 《흑국》(함경도), 《록국》(황해도)이라고 불렀다. 도요또미는 이 지도를 장수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이것은 경상도나 전라도라는 명칭이 왜인들의 귀에 설었던 사정과 관련되였다.(《일본전사》 조선역 구참모본부편)

침략군부대들은 1592년 3월 상순부터 기동을 시작하였다. 3월 13일에 발표된 《일반방략》에 의하면 1차침공군은 1번대로부터 9번대까지 총 15만 8,700명에 많은 수군 등 도합 20여만명이였다.

일본사무라이들은 드디여 1592년 4월 13일 우리 나라의 부산에 대한 공격으로 임진전쟁을 도발하였으며 이로 하여 우리 인민은 7년간이나 전란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다.

섬오랑캐들에 의하여 강요된 임진전쟁은 철두철미 일본사무라이정권의 령토팽창야망과 해외침략정책의 범죄적인 산물이였다.

2. 임진전쟁은 력사에 류례없는 살인, 랍치, 략탈전쟁

임진전쟁시기 일본사무라이들은 도처에서 우리 민족을 대량살륙하고 일본으로 끌어가 노예로동을 강요하였으며 국토를 황페화시키고 값진 문화재들을 닥치는대로 략탈해갔다.

전쟁 전기간 일본살인귀들에 의하여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무참히 학살당하였다.

제1차 침입 때 살인악마들은 이르는 곳마다에서 살풍경을 펼쳐놓았다.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부산성공격전투 이후 왜적들은 남녀로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살륙하였다.

1593년 1월 우리 군대의 전면적인 반공격으로 평양에서 쫓겨나 한성으로 물러간 고니시 유끼나가는 그 분풀이로 성안의 주민들에 대한 대량적인 살륙행위를 감행하였다.

적들이 한성에서 철수한 후 우리 군사가 성에 들어가니 《남아있는 백성은 백에 한둘도 안되였는데 있는 사람조차 굶주리고 지쳐서 얼굴모습이 귀신같았다. 사람과 말이 여기저기 마구 죽어 넘어져있고 악취가 성안에 차넘쳐서 사람들은 코를 싸쥐고 다녔다. 성안팎에는 백골이 무더기로 쌓였고 관청이나 개인집이나 텅 비여있고 남은것은 재더미와 기와쪼각뿐이였다.》고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권27)

1593년 6월 진주성전투이후 왜놈들에 의해 피살된 사람수는 약 6만~7만명에 달하였다. 당시의 기록자료에는 시체가 강을 메우고 떠내려갔으며 물에 빠져 죽은자가 이루 헤아릴수 없었다고 하였다.(《선조수정실록》 권27)

제2차 침입 때 왜적들의 조선인살륙만행은 절정에 달하였다.

살인괴수 도요또미는 조선에서의 대량학살만행을 직접 지시하였으며 극력 조장시켰다.

이놈은 7개조로 된 포고라는데서 다른 나라 사람들의 목무덤을 만들려 한다고 하면서 남녀로소 가림없이 모두 목을 잘라 일본에 보낼것을 명령하였다. 또한 《해마다 군대를 출동시켜 조선사람들을 온통 죽여버려 조선을 빈 땅으로 만든 다음 서로(일본의 서부지역)의 사람들을 옮겨 조선에 살게 하고 동로의 사람들을 옮겨 서로에 살게 하면 10년후에는 반드시 성공이 있을것》이라고 떠벌이였다.(《간양록》)

이 사실은 당시 일본사무라이지배층이 전조선에 대한 지배를 실현하기 위하여 조선인멸종을 기도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도요또미는 이를 위해 1597년 6월 쯔시마도주의 부하를 조선에 보내여 《우선 일본군은 적국(전라도)지방에 진격하여 적국민을 죽일것을 명령한다. 청국(충청도, 경기)과 그밖의 도들에서는 알아서 평정하라.》고 뇌까렸다.

이놈은 《사람의 귀는 둘이라도 코는 하나이니 조선사람의 코를 베여 머리를 대신하라. 군사 한명이 코 한되씩으로 수량이 찬 후에야 생포하는것을 허락한다.》는 잔인한 명령까지 하달하였다. (《고려재출진법도》 제17항, 《간양록》)

이에 따라 왜놈졸병들은 무고한 조선사람들을 마구 죽이는것을 출세의 길로, 도락으로 여기면서 사람사냥에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침략군놈들은 베여낸 조선사람의 코를 모아 도요또미가 파견한 《메쯔께》(위법감찰관)들에게 보냈으며 《메쯔께》들은 살인자들에게 코확인증을 내여주고 코는 일본에 보냈다.

도요또미는 조선에서 보내온 코를 받아서는 직접 세여 확인하고나서 감사장을 보내여 격려해주었으며 신하들도 그 본을 따라 살인자들에게 감사장을 보내주었다.

침략군의 살인죄악을 고발하는 이러한 코수집장과 코확인증, 감사장들은 오늘까지도 일본의 야마구찌현 문서보관소, 아마기시 아끼즈끼향토관, 가고시마현 력사자료쎈터, 도꾜대학 사료편찬소를 비롯한 여러 장소에 보관되여 전해지고있다.

임진전쟁에 참가하였던 오까우찌 히데모또는 《조선이야기》(하)에서 귀무덤(코무덤은 후에 귀무덤으로 개칭)에 묻힌 수가 21만 4,752개로서 그가운데서 조선사람의 수는 18만 5,738개라고 밝혔다.

학살된 사람모두가 코를 잘리운것은 아니였고 또 베여낸 코가 빠짐없이 묻혔다고 볼수 없으므로 당시 적들이 학살한 조선사람의 수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았을것이 명백하다. 어느 한 연구자료에 의하더라도 왜적들은 2차 침공때만도 11만 3,300여명을 살해하였다. 여기에 1차 침공때 부산, 동래, 한성, 평양, 진주 등지에서 대량학살한 사람들까지 합하면 그 수는 수십만명에 달한다. (《중조관계사론문집》 중문)

이 모든 사실은 일본침략군에 의한 귀축같은 대량학살만행이 조선에 대한 지배와 조선인멸종을 노리고 계획적으로 감행된 일본의 특대형국가범죄였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임진전쟁기간 일본침략자들은 수많은 조선사람들을 닥치는대로 랍치하여 그들에게 노예로동을 강요하거나 지어 다른 나라들에 노예로 팔아먹기까지 하였다.

임진전쟁을 일명 도자기전쟁이라고 할 정도로 일본사무라이들은 우리 나라에서 도자기들을 략탈해가는 한편 수많은 도공들을 랍치해갔다.

우리 나라에서 도자기생산의 중심지의 하나였던 전라도 남원에서만도 일본침략군에 의하여 박평의, 심당길 등 43명의 도공이 랍치되였다.

랍치되여간 조선인도공들에 의하여 일본서남부의 여러 지방에서 도자기문화가 개화되게 되였다.

일본침략자들은 도자기기술자들뿐아니라 지어 옷만드는 기술자, 두부만드는 기술자들까지도 랍치해갔다. 임진전쟁후 일본의 여러 지방에서 우리 나라의 정서가 짙은 염직기술이 오래동안 전해져왔는데 이것은 조선에서 랍치해간 염직기술자들에 의해 전파된것이였다고 한다.

일본침략군은 또한 조선에서 수많은 녀성들을 랍치하여갔다.

도요또미는 부하들에게 내려보낸 명령서라는데서 조선인포로가운데서 세공을 하는 자와 봉관(옷만드는 사람), 재간 좋은 녀자 그리고 젊고 예쁜 녀자들을 진상할것을 지시하였다. (《나베시마가문서》 일문)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옛 문헌에서는 《왜적들이 령남의 량반가문의 녀인들가운데서 예쁘장한 녀자들을 골라 5척의 배에 가득 실어 먼저 일본에 보내였는데 그들에게 머리를 빗고 분칠하고 눈섭을 그리게 하였다. …저들의 뜻을 만족시켜주지 않으면 여러 놈들이 돌아가며 간음하였다.》고 전하였다. (《쇄미록》 상 권1)

일본의 한 연구자는 이렇게 끌려간 녀성들이 400년전의 일본군위안부이라고 밝히였다. (《왜란-도요또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으로부터 400년》 일문)

이것은 20세기 일본의 특대형범죄로 지탄받는 성노예범죄가 이미 그 조상들에 의하여 수백년전에 감행되였다는것을 폭로해주고있다.

일본침략자들은 애어린 소년, 소녀들까지도 랍치의 대상으로 삼았다. 첫싸움인 부산성전투직후 성에 기여든 침략군은 아이들을 닥치는대로 사냥하였다. 이에 대해 뽀르뚜갈인이 쓴 《일본사》에는 용모가 뛰여난 남녀아이들이 왜적들의 마수에서 벗어나보려고 어머니가 가르쳐준대로 절름발이흉내를 내거나 미친것처럼 입을 파르르 떨어보였지만 거짓이라는것이 인차 드러나 끌려갔다고 서술되여있다.

이렇게 일본침략자들은 서로 다투어가며 조선사람들을 닥치는대로 랍치해갔다. 이 전쟁을 일명 사람사냥전쟁이라고 하는것도 바로 이런 리유에서였다.

일본에 랍치되여간 사람들의 수는 매우 많았다. 이에 대하여 일본에 랍치되여갔던 정희득은 《월봉해상록》에서 《다리우에서 만나는 10명중 8~9명은 조선인랍치피해자였다.》고 썼다. 그리고 랍치피해자 전이생 등은 글에서 사쯔마에 있는 조선인랍치피해자만도 3만 700여명이나 된다고 하였다.(《광해군일기》 권114)

일본인학자들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이때 조선인랍치피해자수는 10만명이상이였다.(《히데요시·귀무덤·400년》)

일본침략자들은 끌어간 랍치피해자들에게 갖은 고통과 불행을 들씌웠으며 지어 유럽에까지 노예로 팔아먹었다. 나가사끼,하까다 등의 항에는 조선사람들을 노예로 팔기 위한 전문적인 노예시장까지 생겨났으며 그들은 당시 보통매매가격의 1/5정도인 쌀 2섬 4말이라는 매우 눅은 가격으로 매매되였다.

오늘도 일본의 각지에는 조선녀인의 묘들과 도공들의 일터, 조선식거리들이 남아있어 일본사무라이들의 잔악한 랍치범죄만행을 고발하고있다.

일본침략자들은 조선사람들을 랍치하여 끌어가고 노예로 팔아먹었을뿐아니라 우리 나라의 모든것을 파괴하고 략탈해갔다.

일본침략자들은 수도 한성을 점령한후 경복궁과 종묘를 불사르고 선릉(제9대왕 성종의 무덤)과 정릉(제11대왕 중종의 무덤)을 파헤쳐 부장품을 략탈하고 심지어 관을 불태워버리는 만행을 꺼리낌없이 감행하였다. (《선조수정실록》 권26, 권27)

당시 적들이 부장품을 얻기 위해 도처에서 무덤들을 파헤치는 바람에 적들의 강점지역 그 어디서나 쩡쩡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 형편이였다고 한다.(《선조실록》 권63)

왜적들은 평양을 강점한후 부벽루와 고려시기의 숭인전을 불태웠으며 영숭전과 련광정, 진서각, 풍월루, 대동관, 청화관 등 수많은 건축물들을 닥치는대로 파괴하였다. 놈들은 함경도에 기여들어 함흥본궁을, 황해도에서는 소현서원 등을, 개성에서는 리성계가 왕이 되기전에 살았던 목청전과 성균관을 불태우고 파괴하였다. (《쇄미록》 상 권2)

적장 가또 기요마사가 경주의 불국사를 불태워버리자 도요또미는 격려편지를 보내주었다.

임진전쟁시기 일본침략자들은 귀중한 문화재들도 수많이 략탈해갔다.

뽀르뚜갈인이 쓴 《일본사》에 의하면 당시 일본침략군우두머리들의 략탈만행은 더 말할것도 없고 배사공, 운반공, 천민들까지도 조선에서 문화재들을 략탈하여 돈벌이를 하려고 광분하였다.

왜인들의 도서소각, 략탈만행에 의하여 귀중한 문화재보인 《리조실록》은 전주사고본만 보존되고 춘추관, 충주, 성주사고본은 모두 소실되게 되였다. 도요또미의 양자이며 침략군의 총대장이였던 우끼다 히데이에는 도서들을 략탈하여 도요또미에게 바치고 마나세라는 의사에게도 책이 든 궤짝 수십개를 선물로 주었다. 도요또미의 측근신하로 활동한 이시다 미쯔나리는 조선의 국보인 《고려대장경》을 모두 략탈해갔다.

왜적들의 략탈만행에 의하여 임진전쟁이전에 우리 나라에서 출판된 도서의 대다수가 일본에 실려갔으며 이놈들은 략탈해간 수십만권의 도서로 곳곳에 뻐젓이 문고까지 세워놓았다.

일본에서는 우리 나라에서 략탈해간 《양휘산법》, 《산학계몽》, 《상명산법》등의 수학책들을 번역하여 수학을 알게 되였고 이것이 일본의 수학인 와산발전의 기초가 되였다. (《조선기술발전사》4 리조전기편)

일본사무라이들은 도서만이 아니라 동활자와 인쇄기까지 략탈해갔다. 실례로 적장 우끼다 히데이에는 한성에 침입하였을 때 교서관에서 동활자 약 9만자와 인쇄기를 략탈하여 도요또미에게 바쳤다.

일본사무라이들은 우리 나라에서 많은 미술작품들도 훔쳐갔는데 그가운데서 《보살삼존십왕도》, 《당회석가존》, 《양류관음상》, 《오불존상》 등 국보적인 불교미술작품의 대다수가 지금도 일본에 있다고 한다. 왜적들이 략탈해간 조선종들도 오늘날 사이다이지를 비롯한 일본의 여러곳에 남아있다.

참으로 임진전쟁은 일본사무라이들이 조선의 우수한 모든것을 깡그리 략탈하고 훔쳐간 전대미문의 략탈전쟁이였다. 하기에 일본인학자까지도 《히데요시의 침략전쟁은 조선문화를 깡그리 일본에 날라간 문화략탈전쟁이기도 하였다.》고 실토하였다.

× × ×

일본침략자들의 야수적인 만행에도 불구하고 우리 군대와 인민은 왜놈들을 반대하는 투쟁에 한사람같이 떨쳐일어나 불굴의 기상과 애국전통을 힘있게 과시하고 민족의 존엄과 자주권을 영예롭게 지켜냈다.

지나간 력사가 보여주는바와 같이 일본은 침략과 전쟁으로 우리 인민에게 불행과 고통만을 가져다준 죄많은 나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당국은 과거범죄를 성실하게 반성하지 않고있을뿐아니라 오히려 침략전쟁을 미화분식하면서 군국주의선동을 일삼고있다.

최근년간에 검정통과된 력사교과서들의 내용만 보아도 《전국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중국의 명나라를 정복하고 천황과 더불어 대륙에 옮겨가 동아시아로부터 인디아까지 지배하려는 원대한 구상을 가지는데 이르렀다.》고 하면서 임진전쟁을 아시아의 전지역을 지배하려는 《거대한 꿈》으로, 의기왕성해진 도요또미의 《장거》로 묘사하였는가 하면 《조선이 중국에로의 일본국의 통행허가를 거절》하였기때문에 전쟁이 일어난듯이 진실을 외곡하였으며 《조선출병》이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전쟁의 침략적성격을 은페하였다.

죄많은 과거를 애써 감추려는것은 그것을 되풀이하려는 불순한 속심의 발현이다.

오늘 일본반동들은 자기의 과거범죄를 반성하고 청산할대신 오히려 우리의 평화적위성발사를 《장거리미싸일》시험으로 걸고들면서 못되게 놀아대고있다.

제반사실은 세월은 흘렀어도 조금도 변함이 없는것이 일본의 조선침략야망이며 그것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지고있다는것을 뚜렷이 보여주고있다.

일본이 지난 임진전쟁에서 당한 수치와 패배를 망각하고 재침책동에 계속 매여달린다면 수백년을 두고 쌓이고 쌓인 우리 인민의 복수의 불벼락, 선군조선의 총대맛을 톡톡히 보게 될것이다.

(조선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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