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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심단결의 중심에서 / 최고사령관의 령도력 2〉 령도의 계승, 폭풍우 함께 헤쳐온 《전우》

위성발사 보장한 《반타격사령관》

【평양발 김지영기자】2009년 4월 인공위성 《광명성2호》가 발사되였을 때 김정은최고사령관께서는 적대국들의 《요격》소동을 분쇄하는 《반타격사령관》으로서 륙해공군을 지휘하시였다.

어길수 없는 시간표

관계자에 의하면 미군과 남조선군이 동해에 구축함선들을 전개하자 공군의 전위부대가 출동하였다. 고난도의 저공비행에 의한 반공세를 취하여 상대의 작전기도를 수포로 만들었다고 한다.

적들이 요격에로 나오면 진짜 전쟁을 하자고 결심하였댔다고 하는 최고사령관의 《회고담》은 령도자의 뜻을 받드는 《후계자》의 각오를 말해준것이다. 김정일장군님의 별호인 《광명성》으로 불리우는 인공위성의 두번째 발사를 보장한 《반타격사령관》의 공적은 크다. 위성발사는 어길수 없는 시간표에 따라 추진된 계획이였기때문이다.

그 전해인 2008년의 12월, 천리마제강련합기업소(남포시)를 찾으신 장군님께서 2012년에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어제낄것을 호소하시여 《새로운 혁명적대고조》의 시발점을 마련하시였다. 조선의 힘과 기술로 제작된 위성을 다시 한번 우주에 쏘아올리는 계획은 2012년구상을 실현할 담보를 힘있게 과시함으로써 인민으로 하여금 《대고조》의 추동력이라 할수 있는 자력갱생의 정신을 더욱 높이 발양하게 하는 중대계기점이였다.

적대국들이 반대하였으나 조선의 위성은 발사되였다. 로케트를 《탄도미싸일》로 몰아붙이고 《제재》를 가하는 횡포에 대해서는 두번째 핵시험으로 대항하였다. 《장군의 배짱과 담력》이 화를 복으로 전환시켰다. 클린톤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여 오바마대통령의 구두메쎄지를 전달하는 사태진전이 일어난것이다. 2009년 8월, 위성발사로부터 4개월후의 일이였다.

《군사보좌관》으로서

최고사령관께서 공식마당에 등장하신것은 2010년 9월의 조선로동당대표자회이다. 조선인민군 대장칭호가 수여된것은 당대표자회의 직전이다. 그런데 1년전에는 《반타격사령관》으로서 륙해공군을 지휘하시여 적들의 책동을 격파하시였다. 공개된 군사칭호와 다른 차원에서 중요한 권한이 부여된것이라고 볼수 있다.

《김정은동지는 가장 준엄한 혁명의 푹풍우를 장군님과 함께 헤치시며 성장하시였다.》고 관계자들은 해설한다. 1월에 공개된 영화문헌에 따르면 《벌써 일찌기 고난의 행군, 강행군의 그 나날로부터 장군님의 선군령도를 가장 가까이에서 받들어 오시였다.》고 한다. 고난의 행군, 강행군이란 조국이 적대국들과 《총포성없는 전쟁》을 치르면서 경제적시련을 이겨낸 1990년대 후반기를 말한다.

그이의 활동력사는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부분이 있지만 《반타격사령관》의 일화가 말해주듯이 《대고조》가 시작되고 2012년을 향하는 《시한부계획》이 추진되였던 기간에 장군님의 《미더운 오른팔》이 되시여 강성부흥구상의 실현에서 중추적역할을 수행하신것만은 틀림없다. 경제단위 현지지도에서는 장군님의 《제1호위병》이 되시여 그 로정을 먼저 다니시였다. 특히 군사부문에서는 작전과 훈련의 추진정형에 관한 보고를 직접 받으시며 장군님의 《군사보좌관》으로 활동하시였다.

현재 최고사령관의 제일사명은 장군님의 업적을 계승완성하는것이다. 첫 광명성절에 즈음하여 발표된 외무성 군축 및 평화연구소 기념보고서는 《북남수뇌상봉(2000.6)을 시작으로 조미공동콤뮤니케(2000.10)와 조일평양선언(2002.9)이 련이어 채택되고 조선전쟁의 종전선언문제가 추진》되였던 《6.15통일시대》의 복원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이것 또한 장군님의 유훈관철에 대하여 말하고있는셈이다.

최고사령관께서는 이미 2012년을 지향한 《대고조》의 기간에 적대국의 대결소동을 진압하시여 류사한 정치상황을 만들어내신바 있다. 조미공동콤뮤니케에 따라 평양을 방문하기로 되여있던 클린톤 당시 대통령이 2009년 《전직》의 신분으로 뒤늦게 약속을 지켰다. 그 과정에는 《반타격사령관》이 의지와 결단도 크게 작용하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