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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청화대학 정기렬 초빙교수와의 인터뷰

《조대에서 가르치는것은 나의 꿈이였다》

중국 청화대학 정기렬 초빙교수

8일부터 12일에 걸쳐 조선대학교 학생, 연구원생(대학원)들을 대상으로 조대 초빙교수로 특강을 한 중국 청화대학 신문방송대학 초빙교수이며 글로벌인터네트신문 《제4언론》(The 4th Media) 책임주필인 정기렬박사를 본지 최관익편집국장이 12일 대학에서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대화형식의 인터뷰에서 한 정교수의 이야기는 이번에 처음으로 조대초빙교수를 경험하게 된 기쁨과 보람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30년 넘게 해외(미주)통일운동가, 학자, 교육자, 언론인으로 살아온 인생력정에서 얻은 교훈, 민족교육의 중요성, 옳바른 국제정세관, 통일운동가들의 공동의 과제 등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쳤다. 아래에 정교수가 한 이야기를 정리하여 소개한다.

초빙교수된 한없는 긍지와 보람

편집국장:정교수의 특강을 연구원생, 학생들과 함께 유심히 들었다. 그 정열적인 모습에 감동했다. 조대창립 55돐에 즈음하여 해외에서는 처음으로 초빙교수로서 집중적으로 벌린 특강을 끝낸 지금의 심정은 어떠한가?

교수:조대에서 우리 민족의 후대들을 가르치는것은 오랜 꿈이였다. 80년 미국류학을 시작하며 통일운동에 뛰여든 뒤 특히 1987년 처음 재일동포들의 파란만장한 끝없는 고난과 도전, 시련에 찬 력사를 접한 뒤 가진 꿈이다. 특히 《인류사적의의를 갖는다》고 정의해야 옳을 재일동포들의 가슴 벅찬 민족학교(《우리학교》) 력사를 알게 된 뒤 내내 가진 꿈이다. 4반세기를 넘기도록 북미주에서 생활한것도 모자라 오늘 또다시 6년째 해외생활을 하게 되면서 더욱 갖게 된 꿈이다. 중국에서의 초빙교수생활은 중국사회과학원에서의 3년을 시작으로 오늘 중국 최고명문대학이라는 청화대에서 3년째 일하는것으로 이어지고있다.

이 모든것이 다 작은 영예가 아니다. 조대에서의 초빙교수가 갖는 의의와 영광은 남다른것이다. 세상에, 아니 《인류사에 아직은 전무한 사상초유의 대학》이라 정의해서 틀리지 않을 조선대학교에서의 초청이기때문이다. 조대초빙교수로서의 영예를 다른 학교들에서의 영예와 쉽게 단순비교할수 없는 리유다. 래년 남녘나이로 60을 맞는다.

이번 조대에서의 초빙교수 경험은 60을 맞는 나에게 아마도 가장 큰 영광 가운데 하나일것이다.

오늘 마지막 강좌를 끝내면서 학생들의 맑고 깨끗하며 초롱초롱한 눈물을 보았다. 그들의 글썽거리는 모습에서 가슴이 벅차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감당키 어려운 무언가 뜨거운것이 계속 치밀어올라 애를 썼다. 나와 학생들은 물론 문학력사학부 4강좌 내내 함께 강의에 참가한 2분 선생님들도 모두 함께 가슴 벅찬 경험이였던것 같다.

표현하기 어려운 가슴 벅찬 보람이고 기쁨이였다. 끝없는 시련과 도전이 계속되는 일본에서의 민족교육의 미래를 위해 나는 나대로,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주체적으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돕고 참여해야 할지를 서로 다짐하고 결의를 다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편집국장:조대에서 가르치는것이 꿈이였다는것은 어떤 뜻인가? 좀 더 풀어 설명해달라.

교수:나는 20대 후반 미국 류학 직후 곧바로 통일운동에 뛰여들면서 25년이 지나서야 《영구귀국》을 결심했다. 80년대 중반 메릴랜드주립대에서 일하게 되면서 언젠가 때가 되면 우리 후대들을 가르치고싶다는 꿈과 포부를 갖게 됐다. 마침내 2005년 귀국을 결심하고 서울로 돌아가 모교인 감리교신학대학 종교철학부에서 겸임교수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대학 산하에 《통일문제연구소》(가칭)를 개설해 동시에 소장으로 일하는 내부론의 또한 구체화됐다. 그러나 25년만의 새로운 서울생활은 곧 얼마 안가 평생 듣던 《빨갱이》, 《친북좌파용공》 론쟁에 휘말리면서 남녘에서의 미래가 불투명하게 됐다. 그런 상황에서 2006년 2월 뜻밖에 중국사회과학원의 강의초청을 받았다. 2005년 미국시민권을 포기하고 한국국적을 취득하겠다던 청원도 법무부로부터 퇴짜를 맞았다. 4반세기만에 돌아간 남녘땅을 1년 뒤 떠나 또다시 해외생활을 시작하게 된 배경이다.

모교에서는 비록 두 학기 강의였으나 한편 귀한 경험도 했다. 당시 한국사람들의 민족교육, 통일교육에 대한 좌절, 절망감은 적지 않았다. 원인은 당시 《X세대》로 불리는 새 세대들과 그곳 사회주류가 《민족, 통일, 력사》 같은 문제들에 아예 관심이 없다는것이였다. 그러나 나는 전혀 색다른 경험을 했다. 민족, 통일, 력사문제 같은것에 관심도 없고 생각도 없다던 새 세대 학생들속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것이다. 그것도 일반적으로 《보수적 성향의 신학대학생들》의 의식과 생각에 일어난 변화를 말한다.

결국 교육에서 중요한것은 환경, 여건, 처지보다 교육의 한 주체인 선생이 또 다른 주체인 학생대중을 어떻게 대하고 만나고 가르치며 어떤 자세와 내용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하는지가 교육의 성패를 가를수 있다는 귀중한 경험이였다. 그들의 마음을 열어 그들의 의식과 생각을 자신들의 발밑 문제만이 아니라 나라, 민족은 물론 민족의 울타리를 넘어 세상과 인류전체의 문제에로 그들의 관심과 의식을 넓혀가고 바꾸어갈수 있겠는가를 구체적으로 체험했던 귀중한 기회였다.

중국에서 6년째 주로 중국학생들을 대상으로 특히 청화대를 찾아오는 온 세상 타민족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미국에서부터 가졌던 우리 후대들을 가르칠수 있게 되는 꿈을 내내 놓지 않았다. 그러다 작년 10.4 선언 3주년 기념강연 초청을 받고 도꾜에 왔을 때 조선대학교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오래 간직했던 꿈이야기를 처음 입밖으로 냈던것 같다. 그래서 그 꿈이 1년후에 이렇게 이루어지고 오늘 강의를 끝낼수 있었다.

편집국장:같은 민족을 위한 후대교육이라는 뜻에서도 의의가 크지만 통일운동의 길을 꿋꿋이 걸어온 한 사람으로서도 감회가 깊으리라 짐작한다.

교수:그렇다. 수십년 오랜 꿈이 이렇게 이루어질줄은 몰랐다. 정말 감개무량하고 가슴 벅찬 경험이다. 특별히 평생 통일운동의 길을 걷고있는 사람으로 이리도 높은 영예가 없다 싶다.

조대초빙교수라는 의미에는 나름대로 평생 가슴에 담고 사는 뜻, 의지 또한 담겨있다. 분단외세와 그 주구들이 우리 민족에게 강제하는 온갖 분단금기들을 깨고 넘겠다는 뜻과 의지다. 과거 《한나에서 백두까지, 백두에서 한나까지》의 구호를 내걸고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의 뜻과 의지를 담아 1989년 당시 《남북해외 3자련대 통일운동》이 국제련대운동과 함께 분단력사에 새로운 력사를 쓴 《코리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을 말한다. 《통일의 꽃》으로 불리웠던 당시 림수경 전대협 대표가 참가했던 력사다. 외세가 강제한 분단의 벽을, 분단의 온갖 금기사항들을 남북해외3자련대 민간통일운동으로 뚫어내겠다는 전략적의지와 꿈이 담겨있던 사건이였다.

분단력사 내내 총련은 분단세력들에 의해 결코 가서도 만나서도 밟아서도 안될 마치 《지뢰밭》같은, 아마도 분단금기사항 제1호, 2호쯤 되는 대표적 명사 가운데 하나로 여겨져왔다. 조선대학교 또한 마찬가지다. 총련과 함께 분단금기사항 가운데 하나인셈이다. 즉 조대초빙교수가 갖는 의의는 외세가 강제한 분단의 온갖 금기사항들을 깨겠다는 통일운동의 뜻과 의지가 담겨있다고 할수 있다. 평생 통일운동의 길을 걸어온 사람으로서 조대초빙교수란 영예는 개인에겐 분에 넘치는 영예이지만 동시에 겨레전체의 측면에서는 자주평화통일운동이 넘고 극복해야 할 또 하나의 분단시대 금기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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